
스티브 잡스 시절의 아이폰과 아이팟, 아이패드 같은 히트작들은 출시 전까지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졌습니다. 그리고 그 제품이 출시되는 순간은 차라리 축제라고 불릴 만했습니다.
시드니에서 도쿄, 홍콩을 지나 유럽과 대서양을 건너 미국, 그리고 태평양까지, 전 세계 애플 스토어를 횡단하며 신제품 행렬이 생겼습니다. 사람들은 신제품을 처음 만나보기 위해 모여들었고, 제품을 받아 열어보며 기쁨과 감격에 젖곤 했습니다.
당시 애플의 제품은 출시 전까지 극히 제한된 사람들에게만 공개되었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월트 모스버그나 데이비드 포그 같은 아주 한정된 사람들만이 그 이너 서클에 낄 수 있었죠. 그 관계가 얼마나 각별했는지는 모바일미(MobileMe)의 사례가 잘 보여줍니다. 2008년 모바일미가 엉망인 상태로 출시되어 모스버그에게 혹평을 받자, 스티브 잡스는 개발팀을 모아 놓고 “우리 친구 모스버그가 더는 우리에 대해 좋은 글을 쓰지 않는다”며 질타했고, 직원들에게 보낸 메일에서는 출시를 서두른 것이 실수였다고 인정했을 정도였습니다. 소수의 리뷰어에게 미리 제품을 맡긴다는 것은 그들의 평가를 그만큼 무겁게 받아들인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최초의 아이폰은 그 비밀주의가 얼마나 철저했는지를 보여줍니다. 2007년 맥월드 키노트 무대에는 구글 CEO이자 당시 애플 이사였던 에릭 슈미트가 올라왔습니다. 하지만 정작 구글의 안드로이드 팀은 발표를 지켜보며 충격에 빠졌습니다. 안드로이드 책임자였던 앤디 루빈은 준비하던 시제품을 내놓지 않기로 했고, 엔지니어들은 “처음부터 다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회고합니다. 블랙베리를 닮은 그 초기 안드로이드 시제품은 훗날 오라클과 구글의 소송 과정에서 공개되기도 했습니다. 이사회 자리를 나눠 앉은 회사조차 무대 위에서야 실체를 확인할 만큼, 애플의 신제품은 발표 순간까지 베일에 싸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발매되기도 전에, 대부분의 사용자들이 손에 넣기도 전에, 인플루언서라는 이름의 사람들에게 NDA를 체결했다는 이유로 제품을 몇 주간 빌려주고, 미리 사용하게 해주고, 미리 개봉하게 해주고, 미리 감상을 느끼게 해줍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유명 IT 블로그인 기즈모도(Gizmodo)는 아이폰 4의 프로토타입을 발표 전에 입수해 공개했다는 이유로 애플에 출입 금지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애플이 발표한 이후 수많은 인플루언서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라이브를 하고 영상을 올리고 있습니다.
지금 아이폰 듀오를 새로 주문하면 내년 1월에나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는 그 줄을 건너뛰고 맨 앞에서 상자를 엽니다. 애플이 제품을 빌려준 것일 뿐 소유권을 넘긴 것은 아니라고 해도, 적어도 ‘개봉’이라는 경험에 관해서만큼은 명백한 새치기입니다. 그저 인플루언서라는 이유로요.
제가 정말 우려하는 것은 새치기 자체보다 그다음입니다. 잡스 시절에도 리뷰어들은 출시 전에 제품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신문사라는 울타리 안에서 글을 쓰는 기자였고, 모바일미처럼 형편없는 제품에는 혹평을 했습니다. 지금의 인플루언서들은 사정이 다릅니다. 다음 제품도 남들보다 먼저 받아야 조회수가 나오고, 그 접근권은 전적으로 애플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과연 애플 제품의 단점을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 영상을 보고 329만 원짜리 제품의 구매를 결정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믿어야 할까요?
스티브 잡스 시절의 애플과 팀 쿡 시절의 애플, 그리고 이제 막 시작된 존 터너스 시절의 애플을 비교하며 누가 옳았는지 따질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신제품의 첫인상을 독립적인 평가가 아니라 애플이 고른 사람들의 개봉 쇼로 채우는 지금의 방식은 분명히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 자신도 예전에 애플에서 약간의 우대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런 관계가 사람의 펜을 얼마나 무디게 만들 수 있는지 알고 경계했기 때문에, 애플의 지금 행보가 더 씁쓸하게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