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HKB Studio와 시대의 변화

HHKB가 처음 나온 1996년은 GUI와 CLI의 변혁점에 있던 시기였다. 전년도 말에서야 한국과 일본에 출시된 윈도우95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으나 시기 상 아직 모든 것이 윈도우 하에서 GUI로 이뤄지지 못하던 시기였고, DOS는 (Windows 95를 비롯해서) Windows의 근저에 있었으며 전통적인 UNIX가 여전히 힘을 발휘하던 시기였다. 인터넷에서 WWW가 완전히 주도권을 쥐지도 못하였을 뿐 아니라, 많은 경우, 코딩을 한다는 것은 CLI 하에서 키보드 중심의 vi 같은 전통적인 에디터나, IDE를 사용하는 것을 의미했다. HHKB는 그 때 처음 나왔고, 그 이후로 타이핑 경험을 향상시키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그러나 지금은 개발 환경이 윈도우나 macOS 같은 GUI 기반 운영체제로 완전히 이행했고, 인터넷은 곧 WWW가 되었을 뿐 아니라, VSCode 같은 GUI 기반의 에디터가 주류로 자리잡았다. 비단 코딩이 아니라 컴퓨터로 글을 쓰는 것은 곧 Microsoft Word 같은 WYSIWYG 에디터의 사용을 의미하고, 텍스트 위주였던 웹사이트 갱신 역시 걸출한 오픈 소스 CMS인 WordPress의 등장으로 완벽히 WYSISYG 기반이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HHKB는 풀 사이즈 키보드의 60%라는 사이즈적인 이점으로 마우스와의 거리가 가깝다는 장점을 누릴 수 있는 제품이었지만, 어찌되었든 ‘마우스’라는 외부 디바이스 없이는 컴퓨터의 제어를 완결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책상 위에서는 어떻게든 마우스라는 장비를 여느 키보드 보다 가까이 두고 쓸 수 있는 것이 장점이었지만, 책상을 떠나서, 다른 장소에서나 모바일 시에는 그야말로 쾌적한 ‘타이핑’을 위해 무거운 키보드를 휴대하면서도 터치패드를 사용하거나 터치패드가 가려지거나 불편할 경우 외장 마우스를 사용해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HHKB Studio는 2017년 모든 특허가 만료된 포인팅 스틱을 이용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따라서 이제는 (무게가 무거워졌으나) 키보드만 휴대하면 본체의 터치패드나 외장 마우스에 의지할 필요가 없어졌다. 예를 들어 내가 사용하는 메일 소프트웨어는 마우스 커서나 화살표키로 메일을 선택해서 E키를 누르면 메일을 Archive(보관)할 수 있다. 기존 키보드에서는 손을 움직여 마우스를 사용하기 싫다면 화살표키로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HHKB Studio는 손가락 끝으로 움직이는 것 만으로 커서를 움직일 수 있고 손가락 끝만 움직여 원하는 메일을 커서로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다. 대다수 사용자가 사용하는 GUI 에디터에서 커서키와 Home/End 등 기능키를 사용하지 않고 텍스트의 범위 선택이 가능 해졌다. 이 편리함은 내가 ThinkPad를 좋아하던 이유였고, HHKB Studio는 이를 잘 이어받았다.

HHKB Studio를 논하는데 있어 무슨 방식의 스위치를 썼는가라던가 하는 논의는 그런 고로 후속 차원의 논의가 되어야 한다. 어차피 부수적인 문제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HHKB가 세상에 소개된지 27년, HHKB Studio는 완전히 새로운 입력장치로써, 새로운 장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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