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실재 청소년과 성범죄

솔직히 이 글을 써야하는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했다. 나는 글을 쓸 때 두가지 방법을 사용한다. 첫번째 방법은 마인드 매핑이다. 두번째는 독백강연이다. 허공에 대고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해서 설명하며 설득하듯이 논파하는 것이다. 이 글은 독백강연에 의해 쓰여지는 것이다. 그런데, 솔직히 나는 걱정이 된다. 이 글이 가져올 파급이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비실재 청소년은 커녕 성인이 등장하는 것 조차 본 적이 없어서. 범죄를 옹호하는 것은 아닌가? 유해물을 옹호하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허나, 기본적으로 논리를 펴보자면, 사실 이것은 비실재 청소년 묘사와 아동 성폭력에 국한된 말은 아니다. 게임의 폭력성이나 중독, 애니메이션 속의 폭력성 등 오만가지 것들에 적용될 수 있다. 이것이 내가 실제로는 보지도 않는 비실재 청소년 등장물에 대해 변호를 할 수 있는 이유다. 단어나 구절만 조금만 바꾸면 바로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를 보호하는가? 존재하지 않는 존재?

아동 청소년 보호법이 시행되고 나서 우리는 극도로 제한된 세상을 살고 있다. 각종 연구 결과에 따르면 아동 포르노는 아동 성폭력의 가능성을 유의미하게 증가시킨다고 한다. 나는 아동 포르노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도 아니며, 그것을 찬성하는 것 또한 아니다. 우선 아동 포르노는 출연하는 아동의 인권을 심각하게 황폐하게 만드는 커다란 부작용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아동포르노그래피의 제한은 이뤄져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라고 봄직하다. 그렇다면, 아동청소년 보호법에서 규제하고 있는 ‘인식될 수 있는 조항’ 다시 말해 ‘비실재 조항’은 어떻게 볼 것인가? 일단 누구의 인권을 보호하는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존재하지 않는 존재?

마법소녀와 로봇은 졸업했다. 

여기서 들어 올 수 있는 반박은 실재던 비실재던 아동 성묘사를 보면 범죄의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라는 것이다. 간단하게 생각해보자, 어렸을 때 당신은 로보트 애니메이션에 흥분한 적이 있을 것이다. 여성이라면 마법 소녀에 감흥을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언제 그 환상에서 깨어났는가? 성인이라면 실재와 비실재를 구분할 수 있다. 그것이 실제의 아동포르노그래피와 ‘인식될 수 있는 조항’의 문제를 결정적으로 차이 긋는 점이다.

만약, 그것을 차이 짓지 못하고 성범죄를 일으킨다면, 그 사람은 두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다. 첫번째는 욕구조절의 결여이다. 두번째는 2D(혹은 가상세계)와 3D(혹은 현실세계)의 구분인식의 결여이다. 우선 첫번째로 욕구조절의 결여는 이런것이다. 길을 걸어가다가 당신은 섹시한 이성을 보면서 성적인 매력을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혹여 술이라도 취했다면 한번 객기에 헌팅이라도 시도해보려고 할지 모른다. 성적인 매력을 느꼈다고 해서 그 사람을 따라가서 덮치진 않는단 말이다. 두번째로 2D와 3D를 구별짓지 못한다면 역시 마찬가지로 2D나 가상세계에서 일어나는 행위를 현실 세계와 구분짓지 못하는 것이다.  솔직히 이 두가지 문제 다 근본적으로 말해서 정신과적인 치료를 받아서 해결을 짓지 않으면 안된다.

쉿! 구멍이 보인다.

왜? 간단하다. 가령 불법 컨텐츠 들을 막는다고 쳐보자. 그냥 일반인도 아니고 ‘도착증’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서든 구하지 못하리란 법이 없다. 그것을 어떻게 장담할 수 있냐고? 간단하다. 영화나 음악을 보면 모르나? 웹하드를 막으니 토렌트로 가고 어떤식으로든 요리조리 피해가는 것을 보면 말이다. 심의를 무시하고 돌아다니는게 인터넷상의 파일이다. 그것을 막을 길이 있나? 인터넷에 유통되는 파일을 일일히 검문할 것인가?

아동 성도착자와 잠재적 성폭력자들 눈앞에 길을 걸어다니는 것이 아동이다. 아동은 저항력도 떨어지고… 뭐 더 설명이 필요한가? 근본적인 해결은 결국 그들을 지방자치단체나 병원등에서 치료를 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답이 나온다.

왜 당신은 이런 위험한 말을 하나?

헌법재판소의 심판자체로 심의 자체는 검열도, 위헌이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기검열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심의에 걸리면 불이익을 보기 때문에 심의에 걸리지 않기 위해 컨텐츠를 내리고, 표현의 수위를 내리기 시작하고 심의에 걸리지 않도록 컨텐츠를 만들지 않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대다수 선량한 시민의 표현과 향유할 자유가 위축되기 시작했다는데 문제가 있다. 사실상 이는 심의란 이름을 쓴 검열에 다름 아니다. 설령 그것이 저속한 것이라 할지라도 똑같이 대우받아야 한다. 따라서 만약 근본적인 다른 방법이 있고, 그것이 더 효과적이라면 심의제도에 매달리는 것보다는 다른 장치에 의존하는게 훨씬 효과적이고 다른이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옳은 길이다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아무튼 이런 전차로, 동기가 뭐가 되었던 잘못된 방법인 규제와 심의로 사람들을 자기 검열로 이끌고 있다는데는 비실재 청소년 음란물이나 앞서 말한 게임, 애니메이션 등이 다를게 없기 때문이다. 중독이 문제가 된다면 셧다운제가 아니라 중독이 문제가 되는 사람들을 치료하고 사용 방법을 지도했어야 했고, 애니메이션의 폭력이 문제가 된다면 어린이나 청소년이 보지 않도록 부모의 지도등을 통한 방법을 강구하였어야 했다.

침묵하는 시인을 위해 대변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서두에서 밝힌 바를 다시 말하자면, 나는 에로게임도 에로 애니메이션도 보지 않는다. 따라서 어쩌면 완전히 남의 얘기가 될지 모른다. 그런데 이 법 기준이라는 것이 워낙에 미묘하고 자의적이기 때문에 내가 즐기는 다른 작품에 어떠한 형태로든 피해가 오지 않으리란 법이 없고, 아예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등에 대한 발행이나 판매에 대한 자숙에 들어갈지도 모른다. 아리카와 히로의 <도서관 전쟁> 시리즈의 마지막 <도서관 혁명>(도서관 전쟁 : 혁명의 날개로 극장판 애니메이션 영화화 되었다)에서 검열제도에 순응하며 묵인하며 그럭저럭 팔리는 소설을 쓰며 살다가 자신의 책이 검열의 대상이 되어 국가의 도피의 몸이 되는 소설가는 후회하며 말한다. 이러한 제도에 암묵적으로 묵인하여서는 아니되었다고… 당장 내가 즐기지 않는 작품이라고 해서 남의 얘기가 아니라는 얘기다. 그리고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이런 우화가 있다. 왕이 허락한 노래만을 부르지 않으면 잡혀간다. 다른 사람이 잡혀갈 때 구전시인은 침묵했다. 모두가 잡혀가고 정작 자신이 잡혀갈때, 그를 구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신에게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이 글은 그래서 씌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