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번 에버노트 3연작이 예상외로 많은 분들의 공감을 얻었다. 한때 잘나가던 서비스가 어떻게 몰락의 길을 걷게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이렇게 울림이 있을 줄 몰랐다. 그래서 이번에는 비슷한 패착을 겪은 또 다른 기술 기업을 다뤄보려 한다. 바로 블랙베리다.
2011년, 나는 블랙베리 토치를 쓰면서 말 그대로 “이를 갈았다”. 블로그를 20년 넘게 하다보니 오래된 기록도 남아 있는데, 당시 블로그에 남긴 기록을 보면 그 분노가 생생하다.
왜 돈 주고 스트레스를 사서하냐고
“정말 안될때는 머리에 화가 나서 전화기를 던지거나 슬라이더 형식이었으니까 부러뜨리고 싶었었다.”
2011년 12월, 내가 블로그에 쓴 글이다. 브라우저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교체를 받았는데, 부모님이 이걸 보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왜 돈 주고 그런 스트레스를 사서하냐?”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옴니아에 데이고, 엑스페리아 X1에 데이고도, 나는 왜 또 블랙베리를 샀을까?
문제는 브라우저뿐만이 아니었다. 블랙베리의 핵심 서비스인 BIS(Blackberry Internet Service)가 문제였다. 블랙베리의 거의 모든 통신이 캐나다에 있는 RIM사의 BIS 서버를 거쳐야 했다. 이 서버가 다운되면? 인터넷도, 페이스북도, 메일도, 트위터도 할 수 없는 먹통 전화기가 되어버렸다.
소프트웨어 업그레이드 후 페이스북이 3G에서 “속이 터지도록 느리게” 작동하거나 아예 안 될 때, 나는 트위터에 이렇게 사자후를 토했다. “다시는 블랙베리를 사지 않겠다.”
그런데도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그 키보드였다. 긴 트윗을 작성하거나 페이스북 메신저를 쓸 때면, 블랙베리의 쿼티 키보드가 그토록 그리웠다.
전화기가 아니라 사무기기 같았던 OS
블랙베리를 써본 사람들은 안다. 이건 전화기가 아니라 컴퓨터, 아니 사무기기를 쓰는 기분이었다는 것을.
기본 기능은 형편없었다. 그걸 보완하려면 앱월드(App World)에서 앱을 사야 하는데, 가격은 천문학적이었다. iOS 앱스토어에서 99센트나 무료로 구할 수 있는 앱들이, 블랙베리에서는 몇 배의 가격표를 달고 있었다.
그리고 앱을 설치하거나 삭제할 때마다 재부팅을 해야 했다.
21세기 들어서 앱 하나 깔거나 지울 때마다 재부팅이 필요했던 폰은 블랙베리가 유일했다. iPhone이나 Android는 앱을 설치하면 바로 쓸 수 있었다. 삭제해도 그냥 사라질 뿐이었다.
하지만 블랙베리는 달랐다:
- 앱월드에서 비싼 앱을 구매한다
- 다운로드하고 설치한다
- 재부팅한다
- 부팅이 끝나길 기다린다 (보통 1-2분)
- 이제 앱을 쓸 수 있다
앱을 지울 때도 마찬가지였다. 삭제 버튼을 누르면 “재부팅이 필요합니다”라는 메시지가 떴다. 이게 무슨 윈도우 95인가?
2급 시민 취급받는 공식 앱들
더 황당한 건, Facebook과 Twitter 같은 주요 서비스들조차 블랙베리를 제대로 지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내가 블랙베리를 쓰던 2011-2012년, Facebook도 Twitter도 공식 앱을 직접 개발하지 않았다. 대신 RIM이 개발했다. 왜? 시장 점유율이 너무 낮아서 Facebook과 Twitter가 직접 개발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과는 참담했다:
품질이 형편없었다. RIM 개발자들은 Facebook이나 Twitter 서비스를 직접 만든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저 API를 받아서 앱을 만들 뿐이었다. 당연히 세부적인 부분에서 문제가 생겼다.
신기능 도입이 느렸다. iPhone과 Android에 새로운 기능이 추가되면, Facebook과 Twitter가 직접 앱을 업데이트했다. 하지만 블랙베리는? RIM이 API 문서를 받아서, 이해하고, 구현하고, 테스트하고, 배포해야 했다. 그 사이에 몇 주, 심지어 몇 달이 걸렸다.
버그가 빈번했다. 링크를 클릭하면 깨진 페이지가 열렸다. 이미지가 로딩되지 않았다. 특정 기능이 아예 작동하지 않았다. 내가 2011년 겪었던 Facebook 3G 접속 문제도 결국 앱과 BIS의 호환성 문제였다.
업데이트는 또 재부팅. 그나마 업데이트가 나와도 문제였다. 업데이트를 설치하면? 또 재부팅이 필요했다. Facebook 앱 업데이트 하나 설치하는데 2-3분씩 기다려야 했다.
iPhone 사용자들은 App Store에서 Facebook 앱을 업데이트하면 10초 만에 끝났다. 재부팅? 필요 없었다. 바로 실행하면 최신 버전이었다.
블랙베리 사용자들은 무엇을 했나?
- 앱월드에서 업데이트 다운로드 (느림)
- 설치 (느림)
- 재부팅 (2분 대기)
- 부팅 완료 후 앱 실행
- 그런데 여전히 버그가 있음
이게 2012년의 “스마트폰” 경험이었다.
더 큰 문제는 서비스 업체가 직접 개입하지 않으니, 블랙베리 사용자들은 항상 2급 시민 취급을 받았다는 점이다. 새로운 기능이 iPhone과 Android에 먼저 나오고, 블랙베리는 몇 달 후에 (혹은 아예 안) 나왔다. 버그가 있어도 Facebook이나 Twitter에 문의할 수 없었다. “RIM에 문의하세요”라는 답만 돌아왔다.
PC 연결 필수, 통신사 검수 필수
더 큰 문제는 OS 업데이트 방식이었다. iPhone은 애플이 업데이트를 발표하면 사용자가 바로 설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블랙베리는? RIM이 업데이트를 발표하면, 그걸 사용하기 전에 통신사의 검수를 거쳐야 했다.
그 과정은 악몽이었다:
- RIM이 새 OS를 발표한다
- 통신사(한국의 경우 SK텔레콤)가 검수한다 (기간 불명)
- 통신사가 승인하면 배포된다
- 사용자가 수동으로 다운로드받아 PC에 저장한다
- PC에 휴대폰을 연결한다
- 플래시 메모리에 설치한다
- 재부팅한다
한 번의 업데이트에 이 모든 과정을 거쳐야 했다. 더 황당한 건, OS 기능을 추가할 때마다 저장공간을 희생해야 했다는 점이다. 한국어를 입력하려면? 한국어 폰트와 입력기를 별도로 설치해야 했다. 그때마다 가뜩이나 없는 메모리가 줄어들었다.
내가 볼드 9700을 썼을 때, OS 5에서 OS 6으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기대를 안고 업그레이드했더니, 메모리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브라우저를 거의 쓸 수 없었다. 고객지원에 전화했더니 돌아온 답변은 이랬다.
“새 폰을 사시거나, 다운그레이드하세요.”
이게 무슨 전화기인가. 컴퓨터도 이것보단 나았다.
레거시를 버린 바보 같은 선택
가장 치명적이었던 건 OS 7, 8, 그리고 10이 나오면서 기존 레거시를 완전히 내다 버린 것이었다.
블랙베리는 위기를 느끼고 완전히 새로운 OS를 개발했다. QNX 기반의 블랙베리 10은 기술적으로는 인상적이었다. 문제는 기존 블랙베리 OS 앱들과 완전히 호환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게 얼마 안 되던 블랙베리 앱 생태계는 완전히 리셋됐다. 개발자들은 처음부터 다시 앱을 만들어야 했다. 이미 iOS와 안드로이드로 이동한 개발자들이 다시 블랙베리로 돌아올 이유가 없었다.
심지어 블랙베리 10에서도 안드로이드 앱을 돌릴 수 있다고 했지만, 그건 또 제한적이었다. 결국 사용자들이 얻은 건 새 폰을 사도 쓸 앱이 없는 상황이었다.
Apple은 iPhone이 나올 때도 기존 Mac OS의 자산을 활용했다. Google은 오픈소스 전략으로 개발자들을 끌어모았다. 블랙베리는? 얼마 안 되는 자산마저 스스로 버렸다.
2008년, 블랙베리가 세상을 지배하던 시절
2011년 내가 겪은 고통은 사실 블랙베리의 몰락이 본격화되던 시기의 일이다. 그러나 불과 3년 전인 2008년, 블랙베리는 미국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 44.5%를 차지하며 정점을 찍었다.
블랙베리의 시작은 1999년 ‘블랙베리 850’이라는 양방향 호출기(삐삐)였다. 이 작은 기기는 QWERTY 키보드를 달고 있었고, 가장 중요하게는 어디서나 이메일을 확인하고 보낼 수 있었다. 키보드 모양이 검은 나무딸기(BlackBerry)와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었다.
2000년대 들어 모바일 기기의 중심이 호출기에서 휴대전화로 이동하자, RIM(Research In Motion, 블랙베리 제조사)은 전화 기능을 추가한 스마트폰을 내놓았다. 고가였지만 이동 중에 이메일을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과 강력한 보안성 덕분에 기업인들에게 불티나게 팔렸다.
블랙베리 메신저(BBM)는 지금의 카카오톡이나 왓츠앱보다 먼저 나온 모바일 메신저였다. 초창기 멤버였던 짐 발실리는 BBM을 ‘SMS 2.0’으로 진화시켜 일반인에게 보급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경영진은 거부했다. 기업 시장에서 높은 수익을 거두고 있었고, 일반 소비자 시장으로 방향을 틀면 기업 고객을 잃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결과는? 왓츠앱이 시장을 장악했고, 2013년 부랴부랴 출시한 BBM은 플레이스토어 다운로드 수 100만에 불과한 초라한 결과를 냈다.
2007년, 모든 것을 바꾼 아이폰
2007년 6월, 애플이 아이폰을 발표했다. RIM은 충분히 싸울 만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스마트폰 시장은 기업 시장이 중심이었고, 블랙베리의 선호도가 압도적으로 높았다. 더욱이 RIM도 일반 소비자를 위해 멀티미디어 기능을 보강한 블랙베리 펄(Pearl) 시리즈를 출시해 적잖은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러나 RIM은 근본적으로 오판했다. 짐 발실리 전 공동 CEO는 2015년 이렇게 회고했다.
“애플은 휴대폰이 이메일과 전화통화보다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우리는 아이폰을 따라잡으려다 회사를 파괴했다.”
블랙베리는 2008년 터치스크린 폰 ‘스톰(Storm)’을 내놓았다. 클릭할 수 있는 터치 디스플레이와 새로운 앱들을 짧은 시간에 도입했다. 결과는 처참한 실패였다. “그때 나는 우리가 하이엔드 하드웨어로는 애플과 경쟁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발실리는 고백했다.
더 치명적이었던 것은 앱 생태계였다. 2008년 애플이 앱스토어를 열면서 갑자기 앱이 한 곳에 모였고, 대부분 무료거나 99센트 정도의 가격으로 제공됐다. 구글도 안드로이드 폰으로 빠르게 따라붙었다.
블랙베리는 자체 OS를 고집했고, 앱 가격은 터무니없이 비쌌다. 한국에서는 ‘예쁜 쓰레기’라는 별명이 붙었다. 디자인은 예쁘지만 iOS와 안드로이드용 앱을 쓸 수 없어서 기능이 부실했기 때문이다.
중앙 집중의 함정
내가 2011년 겪었던 BIS 문제는 블랙베리의 근본적인 설계 철학을 보여준다. 블랙베리의 핵심 서비스들(트위터, 페이스북, 웹브라우저, BBM, 이메일)은 모두 캐나다 워털루에 있는 RIM의 BIS 서버를 거쳐야 했다.
한국에서 블랙베리로 웹사이트에 접속하면 이런 경로를 거쳤다:
한국 → 캐나다 BIS 서버 → 목적지 웹사이트 → 캐나다 BIS 서버 → 한국
지구 반대편을 두 번 왕복해야 했다. 물리적 거리만으로도 수백 밀리초의 지연이 발생했고, 당시 3G 네트워크 환경에서는 체감 속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느려졌다. 다른 스마트폰들이 직접 통신으로 빠르게 웹을 탐색할 때, 블랙베리 사용자들은 한 페이지 로딩을 기다리며 답답함을 느껴야 했다.
이 방식의 장점은 분명했다. 데이터를 압축해서 패킷을 절감하고, 암호화된 통신으로 보안을 강화할 수 있었다. 버락 오바마가 ‘오바마폰’으로 블랙베리를 사용했던 이유도 바로 이 보안성 때문이었다.
그러나 단점이 더 컸다:
첫째, 지연(latency)이 심각했다. 지구 반대편을 거치는 물리적 거리 때문에 모든 통신이 느렸다. 3G 시대에는 특히 체감이 심했다.
둘째, 서버가 다운되면 모든 것이 멈췄다. 2011년 10월, 유럽, 중동, 아프리카, 아시아 등 전 세계의 BIS 서버가 최대 5일간 다운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블랙베리 사용자들은 이 기간 동안 제대로 된 기능을 거의 쓸 수 없었다.
셋째, 프라이버시 문제가 있었다. 내가 겪었던 페이스북 접속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로그인 정보를 SK텔레콤에 알려주고 나서야 문제가 해결됐다. 왜? BIS 서버 문제였기 때문이다. 모든 통신이 RIM 서버를 거치니, 내 계정 정보도 거기를 지나가야 했다.
“전화기를 완전히 끄는 방법은 배터리를 빼는 것”
더 섬뜩한 사실이 있었다. 블랙베리를 구매하면서 들었던 얘기 중 하나가 이것이었다.
“블랙베리를 완전히 끄는 방법은 배터리를 빼는 것입니다.”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다. 그런데 진짜였다. 기업용 블랙베리의 경우, BES(BlackBerry Enterprise Server) 관리자가 언제든 원격으로 전화기를 켜고 끄고, 심지어 데이터를 지울 수도 있었다.
개인 사용자에게는 큰 의미가 없는 기능이었다. 하지만 기업 사용자라면? 당신이 전화기를 끄고 회의에 들어가도, IT 관리자가 원격으로 켤 수 있었다. 잃어버린 전화기의 데이터를 원격으로 삭제할 수 있다는 건 보안상 장점이었지만, 동시에 내 손안의 기기가 진짜 내 것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애플이 “당신의 iPhone은 당신의 것”이라는 철학을 내세울 때, 블랙베리는 “회사의 블랙베리는 회사가 관리한다”는 철학이었다. 전화기를 정말로 끄고 싶으면, 뒷면을 열고 배터리를 물리적으로 빼내야 했다. 21세기 스마트폰에서 이게 무슨 일인가.
“이메일의 왕”이 이메일 동기화를 못하다니
가장 아이러니한 건 이메일 동기화 문제였다.
블랙베리는 “언제 어디서나 이메일을 확인할 수 있는 기기”로 출발했다. 1999년 블랙베리 850 호출기의 가장 큰 혁신이 바로 푸시 이메일이었다. 이메일이 도착하면 즉시 알려주고, 바로 확인하고, 바로 답장할 수 있었다.
그런데 2011년, iPhone과 Android가 IMAP을 완벽하게 지원하며 실시간 동기화를 제공할 때, 블랙베리는 메일 동기화조차 제대로 안 됐다.
문제는 역시 BIS/BES였다. 블랙베리는 이메일 서버(Gmail, Exchange 등)에 직접 연결할 수 없었다. 반드시 BIS나 BES를 거쳐야 했다. 그 과정에서:
- Gmail 웹에서 삭제한 메일이 블랙베리에 한동안 남아 있었다
- 블랙베리에서 삭제한 메일이 Gmail에서 바로 삭제되지 않았다
- 읽음 표시가 동기화되지 않았다
- 폴더 이동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
왜? BIS/BES가 IMAP 동기화를 ‘스마트’하게 처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iPhone은 어땠나? Gmail 계정 정보를 입력하면 끝이었다. IMAP 프로토콜로 서버와 직접 통신하며 실시간 양방향 동기화가 이뤄졌다. 웹에서 지우면 폰에서도 즉시 사라졌고, 폰에서 읽으면 웹에서도 읽음 표시가 됐다.
블랙베리는 이메일로 그렇게 커다란 인기를 얻었는데, 정작 IMAP 지원이 완벽하지 못했다는 아이러니는 정말 골계스러울 지경이었다.
2000년대 초반 푸시 이메일은 혁신이었다. 그러나 2010년대에 IMAP 표준 프로토콜을 제대로 지원하지 못한다? 이건 혁신이 아니라 퇴보였다.
직접 연결을 막고 중간에 BIS/BES를 끼워넣은 설계가, 블랙베리의 정체성이었던 이메일 경험마저 망쳤다.
“데이터를 말도 안 되게 많이 쓴다고?”
아이러니한 것은, RIM 경영진이 2007년 iPhone 발매 당시 이렇게 비판했다는 점이다.
“아이폰은 데이터를 말도 안 되게 많이 사용한다.”
RIM의 관점에서는 맞는 말이었다. BIS를 통한 데이터 압축으로 패킷 사용량을 크게 줄일 수 있었고, 이것이 블랙베리의 경쟁력이라고 믿었다. 반면 iPhone은 압축 없이 직접 통신하니 데이터를 “낭비”한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RIM의 결정적 오판이었다. 2008년부터 통신사들이 무제한 데이터 요금제를 속속 도입하기 시작했다. 데이터 사용량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빠른 속도가 중요해졌다.
결과는?
- BIS의 데이터 압축 이점은 사라졌다
- 캐나다 경유로 인한 지연만 남았다
- 직접 통신하는 iPhone과 Android는 빨랐다
- 압축하는 블랙베리는 느렸다
초기 2G 시대에는 데이터 압축의 이점이 컸지만, 3G가 보급되고 무제한 요금제가 일반화되면서 BIS는 오히려 발목을 잡는 설계가 되어버렸다. RIM이 “효율성”이라고 자부했던 것이, 사용자에게는 “느린 속도”와 “엉망인 동기화”로 경험된 것이다.
“데이터를 많이 쓴다”는 비판이 결국 자신들의 패착이 됐다.
구글이나 애플의 직접 통신 방식에 비해, 블랙베리의 중앙 집중 방식은 단일 실패 지점(Single Point of Failure)이자 병목 지점(Bottleneck)이었다. 그리고 기업 시장에서는 통제 지점(Control Point)이기도 했다. 그리고 개인 사용자에게는 동기화 실패 지점이었다.
기업 시장의 역설
블랙베리는 항상 “기업의 선택”을 내세웠다. 보안성, 안정성, 관리 편의성을 강점으로 내세우며 기업 시장을 장악했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기업에서 블랙베리를 도입하려면 BES(BlackBerry Enterprise Server)를 별도로 구축해야 했다. 이게 무슨 의미인가?
일반적인 스마트폰은 회사 이메일 서버(Exchange, Gmail 등)에 직접 연결하면 끝이다. iPhone도, Android도 그렇다. 하지만 블랙베리는 달랐다:
회사 이메일 서버 ↔ BES 서버 ↔ 블랙베리 기기
기존 이메일 서버 외에 BES라는 중간 서버를 추가로 설치하고 관리해야 했다. 물론 BIS처럼 RIM이 통신을 열람할 걱정은 없었다. 온프레미스(on-premise)로 자사에 설치하니까. 하지만 그만큼 IT 부서의 부담이 늘어났다.
- BES 서버 구축 비용
- BES 라이선스 비용
- 서버 유지보수 인력
- 보안 패치 및 업데이트 관리
- 추가 하드웨어 및 네트워크 인프라
iPhone이나 Android를 쓰면 필요 없는 인프라를 블랙베리 때문에 추가로 구축해야 했다. 이게 “기업의 선택”이라고?
힐러리 클린턴의 BES 서버 스캔들
이 구조로 인한 약점이 드러난 가장 유명한 사례가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의 개인 이메일 서버 논란이다.
클린턴은 국무장관 재임 중(2009-2013) 국무부 공식 이메일 대신 개인 사무실에 설치한 온프레미스 BES 서버를 통해 블랙베리로 업무를 처리했다. 왜? 블랙베리를 쓰고 싶었는데, 국무부 BES 서버는 보안 규정상 개인 기기를 연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린 결정이 집에 BES 서버를 직접 설치하는 것이었다.
결과는? 2016년 대선 당시 최대 스캔들 중 하나가 됐다. 기밀 정보가 개인 서버를 통해 처리됐다는 의혹, FBI 수사, 이메일 삭제 논란 등으로 이어졌다. 블랙베리를 쓰려고 개인 서버를 둔 것이 정치 생명을 위협하는 사건으로 번진 것이다.
이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 블랙베리는 기업 인프라에 쉽게 통합되지 않았다
- 사용자(이 경우 국무장관)가 블랙베리를 쓰려면 별도 서버 구축이 필요했다
- 그 과정에서 보안 허점이 생길 수 있었다
블랙베리가 “보안”을 내세웠지만, 정작 그 보안을 위해 추가 인프라를 강요하는 구조가 오히려 보안 리스크를 만들었다.
iPhone은? Exchange 서버에 바로 연결하면 끝이다. 별도 서버도, 복잡한 구성도 필요 없다. 기업 입장에서 어느 쪽이 더 합리적인 선택일까?
블랙베리는 BYOD(Bring Your Own Device) 시대에도 뒤처졌다. 직원들이 개인 iPhone이나 Android를 회사 이메일에 연결하는 건 간단했다. 하지만 블랙베리를 쓰려면? BES 서버가 필요했다.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블랙베리 한두 대 때문에 서버를 구축하는 게 말이 안 됐다.
“기업의 선택”이라던 블랙베리가, 정작 기업에게는 부담이었다.
2012년, 본진에서의 패배
2012년 3월, 블랙베리는 창립 20주년을 맞았다. 그러나 같은 해, 본진인 캐나다에서조차 스마트폰 점유율 1위 자리를 아이폰에 내주었다. 삼성이나 LG가 자국에서 더 많이 팔리는 것처럼, 블랙베리도 캐나다에서는 강세를 보였는데, 그마저 무너진 것이다.
한국 시장은 더욱 가혹했다. 비업무용 수요가 대부분인 한국 스마트폰 시장에서 블랙베리는 업무용에 특화된 플랫폼이었다. 게다가 SK텔레콤은 기업 시장에서도 갤럭시 S를 밀었다. AS 문제도 심각했다. 접수하면 한 달 대기는 기본이고, 두 달이 걸리는 것도 흔했다.
너무 늦은 각성
블랙베리는 2013년 회사명을 아예 ‘블랙베리’로 변경했다. 원래 회사명인 ‘리서치 인 모션(RIM)’을 버린 것이다. 그만큼 절박했다. 하지만 2013년에 안드로이드 앱도 사용 가능한 OS를 출시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2016년, 블랙베리는 스마트폰 자체 제조를 중단하고 중국 TCL에 상표권을 넘겼다. TCL은 안드로이드 OS를 받아들여 ‘블랙베리 키원’, ‘블랙베리 키투’ 등을 내놓았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2020년 2월, TCL마저 블랙베리 스마트폰 제조·판매 중단을 선언했다. 2022년 1월 4일, 블랙베리는 블랙베리 OS 서비스를 완전히 종료했다. 전화통화, 메시지 서비스 등 기본 기능조차 안정적으로 작동하지 않게 됐다.
1999년 시작해서 2022년 종료. 23년의 역사가 막을 내렸다.
교훈: 기업 시장의 함정
블랙베리의 몰락은 에버노트와 비슷한 교훈을 남긴다. 기존 강점에 안주하면서 시장 변화를 외면하면, 10년도 안 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첫째, 기업 시장만 보다가 소비자 시장을 놓쳤다. BBM을 일반 소비자용 메신저로 진화시킬 기회가 있었지만, 기업 고객을 잃을까 두려워 거부했다. 결과는 왓츠앱의 승리였다.
둘째, 사용자 경험을 완전히 무시했다. 통신사 검수를 거쳐야 하는 업데이트, PC 연결이 필수인 설치 과정, 메모리를 갉아먹는 기본 기능들, 앱 설치할 때마다 재부팅, Facebook과 Twitter조차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환경. 이건 소비자 제품이 아니라 산업용 장비 수준이었다.
셋째, 하드웨어 중심 사고에 갇혔다. 키보드라는 물리적 강점에 집착하면서, 앱 생태계라는 소프트웨어 혁명을 놓쳤다. 그나마 있던 앱들도 천문학적 가격으로 사용자들을 외면했고, 주요 서비스들은 RIM이 대신 개발해야 할 정도로 외면받았다.
넷째, 중앙 집중 방식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BIS는 초기엔 혁신이었지만, 네트워크가 빨라지면서 오히려 병목이 됐다. 캐나다 경유로 인한 지연, 서버 다운 시 전체 마비, 그리고 이메일 동기화조차 제대로 안 되는 치명적 약점을 안고 있었다.
다섯째, 기업 인프라에 부담을 줬다. “기업의 선택”이라면서 정작 기업에게 BES 서버라는 추가 부담을 강요했다. iPhone과 Android가 기존 인프라에 바로 연결되는 동안, 블랙베리는 별도 서버 구축을 요구했다.
마지막으로, 레거시를 버리는 바보 같은 선택을 했다. OS를 완전히 갈아엎으면서 기존 생태계를 스스로 파괴했다. 이미 iOS와 안드로이드로 떠난 개발자들을 다시 불러올 방법은 없었다.
2011년의 나, 그리고 지금
2011년 말, 나는 블랙베리 토치와 씨름하면서 “다시는 블랙베리를 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면서도 그 키보드를 잊지 못했다.
결국 나는 iPhone 4S를 샀다. 2011년 12월에 쓴 글에서 iPhone 4S의 속도에 감탄했다. “S는 Speed가 아닐까?”
지금 돌아보면, 2011년은 스마트폰 시장의 판도가 완전히 정리되던 시기였다. 블랙베리는 이미 게임에서 졌고, iOS와 안드로이드 양강 구도가 확립되던 때였다.
그래도 가끔 생각한다. 만약 블랙베리가 2007년에 다르게 대응했다면? BBM을 개방했다면? 안드로이드를 일찍 받아들였다면? 사용자 경험을 최우선으로 했다면? BIS/BES를 버리고 직접 연결을 허용했다면?
하지만 역사에 가정은 없다. 블랙베리는 그저 우리에게 교훈을 남기고 떠났다. 혁신을 멈추는 순간, 승자도 패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사용자를 무시하면, 아무리 기술적으로 앞서도 결국 외면받는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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