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해킹 키보드(HHKB) 사용한지 20년째, 내가 계속 사용하는 이유

키보드를 사용하는 사람의 손

HHKB의 배열과 철학. 그리고 ‘입력 손실’을 줄이는 키보드란?

올해(2026년)는 제가 해피해킹 키보드(HHKB)를 사용한지 20년째 되는 해입니다. 2006년부터 2020년까지 HHKB Professional 2를, 2020년부터 HHKB Professional Hybrid Type-S를, 그리고 2023년 연말부터는 HHKB Studio를 같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도중에 다른 키보드로 외도를 시도했지만 결국 HHKB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HHKB에는 결국 HHKB 만의 매력이 있기 때문이고, 저에게 있어서 HHKB는 손가락의 연장처럼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정전용량무접점 키보드 자체가 시장에 드물었기 때문에 해피해킹 키보드의 장점이 유독 크게 다가 왔습니다만, 이제는 토프레의 ‘리얼 포스’를 비롯해서 중국 메이커에서도 정전용량 무접점 키보드는 나오고 있기에 그렇게 신기한 존재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제가 해피해킹 키보드를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설명하고자 합니다. 이 글은 20년간 HHKB를 써온 한 사용자가, 왜 여전히 이 키보드로 돌아오게 되는지를 정리한 기록입니다.

20년 째 해피해킹 키보드를 사용하는 이유는?

독특하면서도 합리적인 배열

특히 윈도우나 리눅스를 사용하면서 느끼게 됩니다만 두 OS에서 Control키의 존재는 매우 큽니다. 문서에서 복사/붙여넣기를 하는 것은 물론이요 터미널 작업을 하다보면 Control을 반드시 사용하게 됩니다. 이 키보드 자체가 UNIX 워크스테이션(구체적으로는 Sun사 제품)에서 vi나 emacs를 사용하는 프로그래머를 위해서 처음 발상된 키보드이기 때문에, 그에 맞추어 철저하게 불필요한 키는 빼거나 Fn 레이어 밑으로 숨겨두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꼭 필요한 키는 크고 치기 좋은 배열을 하고 있습니다. 이 키보드를 제품화함에 있어서 제작사인 PFU의 사람들은 단순히 유닉스 워크스테이션용 키보드로는 금형 대금 조차 뽑지 못할 것을 우려했고, 그래서 PC를 위해서 Fn 레이어를 통해 F키를 추가하거나, 화살표 키를 추가했습니다. 최초의 프로토타입에서는 Option/Alt 조차 없던 것을 “이래서는 맥 사용자들이 쓸 수 없습니다”라는 이유로 추가하게 된 사연이 있습니다.

이 특수한 배열은 처음 볼 때는 정말 괴랄하기 짝이 없어서 평소에 제 컴퓨터를 만지지 않는 사람이 만지게 되면 PC 사용 경력이 꽤 되시는 분 조차 ‘보통 키보드 없냐’라고 하실 정도지만, 저 자신은 이미 20년을 쓰다보니 ‘보통’ 키보드와 HHKB를 자연스럽게 오가는 ‘키보드의 바이링구얼’이 되어 있었습니다.

‘연년 커지는 키보드의 안티테제’로 출발

이 키보드의 발상자인 와다 에이이치 선생(도쿄대 명예교수)은 자신이 처음 컴퓨터를 사용할 때는 거의 타자기와 다를게 없던 키보드가 이 기능 넣고 저 기능 넣더니만, 화살표 키가 생기고 나중에는 10키가 생기면서 연년 키보드가 커지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는 모양입니다. 그러다보면 키보드가 책상에서 차지하는 면적이 늘어나고, 그러면서 기종 의존적인 키들이 생기는 것에 불만을 품게 됩니다. 이 기종 나오면 달라지고, 저 기종 나오면 새 키가 생기고, 또 다른 기종 나오면 없어지고… 그래서 그는 최소공약수적인 키보드 디자인을 통해 자리를 덜 차지하고 필요할 때는 휴대하며 어느 기종에서든 쓸 수 있는 그 유명한 ‘말 안장’ 비유와 같은 키보드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미국 서부의 카우보이들이 여행 중 말이 죽으면 그 말을 버리고 떠나지만, 사막 한가운데에서도 절대 안장은 버리지 않습니다. 말은 소모품이지만, 안장은 몸과 밀접하게 연결된 인터페이스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PC는 소모품이지만 키보드는 오랜 시간 사용하는 중요한 인터페이스입니다.” – 와다 에이이치, 도쿄대 명예교수

제가 2006년에 사용한 컴퓨터와 지금 사용하는 컴퓨터는 OS도 다르고, 성능도 비할 바가 안 될 정도로 차이가 나지만 그 때 익힌 배열을 막힘 없이 쓸 수 있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아이디어나 문장일 것이고, 프로그래머에게는 코드가 머리에서 최대한 막힘 없이 술술 쓰여 나갈 수 있도록 ‘입력 손실’을 줄인 키보드가 HHKB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프로페셔널이든 스튜디오든 고품질의 키보드

서두에서 말씀 드렸지만 저는 HHKB의 Professional과 Studio를 모두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정전용량 무접점 방식이고 하나는 리니어 스위치의 기계식 키보드입니다. 둘은 겉만 같고 속은 완전히 다른 것이지요. 하지만, 공통적인 점도 있습니다. 모두 세월과 많은 사용자에게 검증 받은 고품질 스위치를 사용하는 고급 키보드라는 점입니다.

이미 Professional의 토프레 스위치는 20년 넘게 HHKB와 리얼포스를 통해 검증된 우수한 품질의 스위치입니다. 한편으로 Studio의 커스텀 스위치를 공급하는 카일(Kailh) 역시 체리와 게이트론과 함께 우수한 메커니컬 스위치 공급사입니다. 그 결과, 프로페셔널이든 스튜디오든 고급스럽고 만족스러운 키 타이핑 경험을 경험 할 수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막힘없는 배열’과 함께 머리에서 컴퓨터로 입력할 때 손실과 저항, 스트레스를 극도로 줄인 키보드라고 저는 생각 합니다.

Studio의 경우에는 아직 그렇게 오랜 세월이 되지 않아 뭐라 말 할 수 없지만 Professional Hybrid Type-S와 Professional 2의 경우 길게는 20년 넘게 전혀 고장이나 눈에 띄는 마멸, 소모 없이 잘 사용하고 있습니다. 특히 HHKB는 일찍이부터 키 톱을 승화 인쇄를 고집해왔고, 그 결과 20년 된 Professional 2 역시 키 톱의 문자가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은 고무적입니다.

누구에게나 권할 수는 없지만 누구나 써봤으면 하는 키보드

해피해킹 키보드는 보통 3~40만원 이상 하는 가격도 그렇고, 정식 수입이 안되서 개인 수입을 해야만 하는 입수 난이도도 그렇고, 화살표나 몇몇 특수 기호의 기괴한 배열도 그렇고, 단축키 위치의 변경으로 인한 적응 시간 필요 등 여러가지 까탈스러운 면이 있어서, 누구에게나 권할 수는 없는 키보드입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누구나 한번 쯤은 써봤으면 하는 그런 좋은 키보드입니다. 조금만 욕심을 낸다면 PFU를 인수한 리코(Ricoh)사가 한국에서도 HHKB를 정발 해주길 하는 바람은 있습니다만, 어쩔 수 없거니 하고 체념하고 있습니다.

푸른곰이 HHKB를 세 대 쟁여 두고 있다는 사실

사실, HHKB를 만든 PFU라는 회사가 지금은 리코의 자회사입니다만, 원래는 후지쯔의 자회사였습니다. 2022년 경 손갈이를 했는데요. 그 때 저는 리코라는 회사의 목적이 PFU가 만들어서 나름 지위를 갖추고 있었던 페이지 피드 스캐너인 스캔스냅(ScanSnap)이 목적이라고 생각했고, 키보드 사업은 축소 내지는 폐지할 것을 우려했습니다. 그래서 HHKB Professional Type-S를 두 대 쟁여 두었습니다. 다행히 사업은 여전히 지속되었고, 그렇게 나온 HHKB Studio의 경우 각종 예비 부품과 액세서리를 포함해 한 대의 예비를 더 보관 하고 있습니다. 지난 번에 블랙윙 602 연필에 대해 소개 했을 때, 작가 존 스타인벡이 일과 전에 늘 스무 자루 이상의 블랙윙을 깎아 두었다는 일화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그가 그처럼 연필에 집착했듯이 제가 HHKB를 계속 사용하는 이유는, 이 키보드가 제 사고의 ‘입력 손실’을 최소화하는 몇 안 되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저는 그래서 HHKB를 그렇게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매력이 있는 키보드라고 생각하고 있고, 여러분께도 그 매력의 일부나마 전달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푸른곰
푸른곰

푸른곰은 2000년 MS의 모바일 운영체제인 Pocket PC 커뮤니티인 투포팁과 2001년 투데이스PPC의 운영진으로 출발해서 지금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2005년 이후로 푸른곰의 모노로그를 운영하고 있으며 지금은 주로 애플과 맥, iOS와 업계 위주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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