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원고 교복을 입은 학생에 대한 추억

생활리듬이 그렇게 일정치 않고 출입이 드문 나로써는 졸업한 중학교가 지척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후배들의 모습을 쉽게 보지 못한다. 가끔 아침에 창밖으로 보는 정도다. 어쩌다 최근에 길을 가다가 발견한건데 솔직히 내 눈에도 촌스럽기 그지 없던 우리 모교의 교복이 좀 더 세련되게 바뀌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행이다, 후배들과 교사들과 학부형들이 문제 의식을 가지고 있구나.  처음 교복을 입던 날의 우울한 기분을 후배들은 좀 덜 느끼려나.

요즘 학교 교복, 특히 신설 학교 교복은 참 예쁘다. 색도 세련되고 원단의 느낌도 내가 다니던 때의 그것에 비할 것이 아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연기자들이나 CF에 나오는 그런 수준의 화려한 교복까지는 아닐지언정 몸짓 하나에 잔뜩 싱그러움이 묻어나는 시절의 아이들이 입으면 정말 예쁘다.

종합병원 대기실에서 책을 읽고 있었을 것이다. 몇 년 전일까… 연갈색과 적갈색의 중간의 블레이저 교복을 입은 여학생을 보았다. 나는 잠시 책을 덮고 크게 심호흡 한번 하고서 용기를 내서 양해를 구한 뒤 어느 학교냐고 물어 보았다. 여학생은 생판 남에게서 갑자기 이상한 질문을 받은 뒤, 잠시 머뭇거리다 자신의 학교를 얘기해 주었다.

몇 년뒤, 같은 병원에서 그녀의 후배들을 보는건 크게 어렵지 않았다. 특히 이즈음이 되면 나는 아직도 생각이 난다. 버스를 타고 단체로 입원하던 어린 학생들의 모습. 그들이 마치 죄진것도 아닌데 밤에 취재진들의 시선을 피해 서둘러 들어가는 로비는 그전에도 그때도, 그리고 지금도 내가 평소에 들락거리는 바로 그 곳이다. 방송에선 내가 수도 없이 오가던 병원에 진치고 생중계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텔레비전으로 그 장면을 보았다. 늘 보던 풍경이 다르게 보이던 이상한 기억.

그들은 내가 단순히 교복이 예뻐 물어보았던 여학생의 후배들이다. 내가 학교가 어딘지 물었던 그녀는 자신의 학교를 단원고라고 얘기했다.

내가 4월 16일에 뭘 하고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혹자는 “전국민이 그날의 일을 다 기억하는데 대통령이 뭘 하고 있었는지 모르는게 말이 되냐”라고 했었던 그 날. 잘은 모르지만 나는 아마 평소처럼 느지막히 일어나 텔레비전에서 어이없는 상황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일말의 동정심도 없지만 의외로 뭔일이 있는지 까먹은 사람도 있다는걸 얘기해주면 그녀는 덜 삐치고 재판에 좀 나오려나. 좌우간 우리집 텔레비전은 특별한 변고가 없는한 YTN에 고정되어 있다. 다른 채널에서 하는 프라임타임 뉴스나 가끔 보는 애니메이션 방송 정도, 그리고 최근 들어서야 크롬캐스트로 유튜브나 VOD를 보기 위해서 외부입력이 좀 바뀌는 정도인데. 여하튼 그때는 YTN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에 나를 보던 의사 선생은 1년 전에 바뀐 사람으로 안경을 쓰고 자상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처음에 만났을때는 대단히 어색했을 뿐더러 두번째 주치의 교체라는 상황도 있어서 세상사 믿을거 없다는 듯이 마음이 닫혀있었다. 그러다가 좀 지내볼만 하나 싶은데 그가 말했다. 1년전에 자기한테 나를 맡겨두고 떠났던 선생이 돌아온다는 것이었다. 다음 예약부터 그에게 돌아가는게 좋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사고가 났다.
내 예약 일주일 전이었다. 나는 그 선생을 텔레비전으로 먼저 볼 수 있었다. 생존자 상태 브리핑을 하기 위해 연단에 선 의료진 중 한명이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내 예약 날짜가 되었을때 나는 평소와는 좀 다른 분위기의 공기를 마시며, 세월호 생존자들이 걸어 들어간 로비를 지나가 진료과로 갔다. 나는 간호사와 간호조무사에게 수고가 많으시겠다고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서로가 난감하고 다감한 표정이었을테다. 그러잖아도 이 병원 정신건강의학과는 이 두명과 때로 한명 정도의 보조 스태프가 더해서 교대없이 굴러간다. 갑자기 쏟아진 트라우마 환자들은 그러잖아도 신규 외래 대기 수개월이라는 이 진료과에 멜트다운을 일으키기 충분했을 것이라 짐작이 되었다. 실제로 진료 스케줄에 이후 한동안 파행이 일어났다.

나는 초등학생 시절에 사회과 부도를 참 좋아했지만, 대한민국 백지도를 펼치고 나서는 진도가 어디에 있는지도 찍을 수 조차 없다. 단언컨데 여기도 사고 현장의 연장이었다. 일년만에 본 선생은 머리카락이 하얗게 새어있었고 매우 지치고 피곤해 보였다. “선생님은 저를 일년만에 보지만 저는 선생님을 일주일 먼저 뵈었다”라고 하니 쓴 웃음을 짓는다. “수고 많으셨다”라고 밖에 할 말이 없다.

단원고는 내 고교 2,3년때 은사가 근무하던 단원 중학교와 바로 인접해 있다. 가끔 은사에게 전화를 해서 안부를 전하고 묻고 했는데 그 즈음의 통화에는 당연히 옆 학교 얘기가 안나올 수가 없다. 그냥 허허 웃는다. 인상 푸근하고 늘어진 눈웃음이 복 가득한 그의 얼굴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맘 먹기에 따라서는 내가 다니는 병원에서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거리이다. 언젠가 지도를 열어본 적이 있다.

그러니 단원고 학생의 연갈색 교복을 병원에서 보는 것이 아주 힘든일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그랬고. 하지만 나는 한동안 그들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서 시선을 피했다. 그게 할 수 있는 배려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시간이 지났다. 이제 정신건강의학과는 겉으로 보기에는 다시 평화롭다. 여전히 환자로 북적북적이고 그때 머리가 샌 담당의는 그냥 샌 머리를 자기 트레이드마크로 삼기로 했는지 염색도 안하고 지내고 있지만. (그는 진료를 할때 내 블로그를 훌쩍 들어갔다 나오곤 하므로 진료하러 가면 어차피 보게 될 것같다. 멋대로 글감으로 써서 미안한데 그의 평가를 다음 진료 때 한번 들어 볼 참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띄엄띄엄이라도 눈에 띄던 단원고 학생들이 어디로 갔을까. 생각을 한다. 당연히 생존자들은 이미 단원고를 떠난지 오래일 터, 어떤 모습이래도 놀랄 것은 없다. 만약 그들이 계속 이곳을 다닌다 하더라도 겉으로 판단하기는 힘들 것이다. 교복이라는 것은 학생이라는 신분의 상징이자 증표이니 말이다. 이미 학생일리 없는 사람이 대기실에서 책을 읽을때 평범히 옆에 앉아 있는 젊은 친구일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물어보지 않았으니 알 턱이 없다.  설령 이제사 단원고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눈에 띄더라도 사건 당사자일리 없지만 누가 됐던 어린 학생들이 되도록이면 종합병원하고는 연이 없는 삶을 살기를 바랄 뿐이다.

다시 4년전 경으로 돌아가서. 복잡한 생각을 품으며 병원을 나서서 택시를 타고 집으로 온다. 택시 손잡이에는 근조 리본이 온 시내에 희생자의 명복을 비는 현수막이며 걸개로 스산하다. 사고 당시 30년 가까이 살아온 이 도시를 흔히 공업도시라고 일컫는데, 정말 그때만큼은 회색 도시 그 자체였다. 경망스럽게 웃지도 못할 것 같은 공기가 한동안 걸렸을 만큼 온 도시의 사람들이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오는데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지만 안산에 사는 75만명 대다수는 4.16 이전과 이후, 삶이라는 나이테에 적건 많건 깊건 얇건 어떤 지울 수 없는 흔적을 가지고 오늘도 살아가고 있다. 세월호 참사라는 대형 참사는 그런 것이었다.

올해 4월 16일 영결식을 기해서 병원에서 좀 더 서쪽으로 가면 있는 합동 분향소가 철거된다고 한다. 이렇게 한가지 매듭을 짓고자 하는 것일 듯하다.  나는 온라인에서 사는 곳에 대해 말하는 것을 삼가왔고 그런 일련의 흐름에서 4.16과 세월호에 대해서 대단히 소극적이었다. 이 글은 나 스스로가 매듭을 짓기 위해 썼다. 여러모로 부담은 가지만 그래도 필요한 행위라고 생각했다. 잘하는 짓인가 싶긴 하지만.

추기: 나는 위에서 안산에 사는 대다수는 삶이라는 나이테에 어떤 지울 수 없는 흔적을 적건 많건 깊건 얕건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적었지만 그 흔적은 정말 사람에 따라 다른 모양이다. 화랑유원지에 추모 시설을 짓는 것을 집값 떨어진다고 반대하는 일부 시민들을 보면서 같은 시민으로서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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