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곰의 연필에 대한 사랑

소련의 우주인들은 연필을…

우스갯소리로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NASA에서 우주에서 써지는 볼펜을 만드는 데 수백만 달러를 소비할 동안 소련 우주인들은 연필을 썼노라”고(실제로는 NASA가 ‘우주 볼펜’을 개발하지도 않았으며, 나중에는 소련도 똑같은 ‘우주 볼펜’을 사용합니다).

물론 이건 그냥 농담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저는 연필을 정말로 좋아합니다. 이 우스갯소리가 반증하는 것은 냉전 시대의 여러 가지 부조리도 있겠지만, 그만큼 연필이 값이 싸고 신뢰성이 높은 도구라는 증명도 되는 거 아닌가 싶습니다.

실제로는 우주 계획에서 연필은 그다지 사용되지 않았다고 하죠. 부러진 심이나 미세한 흑연 가루가 무중력에서 떠다니며 눈·기기에 들어갈 위험, 전기 전도성을 지닌 흑연 입자 문제, 무엇보다 흑연과 나무의 가연성이 문제시 되었기 때문입니다. NASA는 아폴로 1호 화재 이후 타기 쉬운 물건을 극도로 꺼렸습니다.

연필의 미덕

하지만 저는 지구에 살고 있죠. 지상에서 연필은 여전히 믿을 만한 필기구입니다. 심이 완전히 부러지지만 않았다면 종이에 닿는 순간 바로 흔적을 남깁니다. 캡을 열 필요도, 잉크가 말랐는지 확인할 필요도 없고, 쓸 수 있는 상태인지는 눈으로 곧바로 알 수 있습니다.

노크식 볼펜도 버튼 한 번이면 바로 써지니, 연필이 객관적으로 더 빠르다고 우길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깎아 둔 연필을 집어 종이에 대는 그 단순한 동작에는 유난히 적은 마찰이 있습니다.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을 한시라도 빨리 붙잡아 두고 싶을 때, 뚜껑을 열거나 노크를 누르는 그 한 단계조차 없다는 사실이 든든하게 느껴집니다.

그렇다고 연필이 늘 편리한 것은 아닙니다. 심은 무뎌지고 부러지며, 계속 쓰려면 언젠가 다시 깎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 자루를 미리 깎아 손이 닿는 곳마다 놓아둡니다. 정확히 말하면 연필 한 자루의 즉시성이라기보다, 언제든 집어 들 수 있게 준비된 연필들이 주는 안도감을 좋아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이 준비의 미학을 극단까지 밀어붙인 사람이 작가 존 스타인벡입니다. 그는 글을 쓰기 전에 여러 자루의 연필 — 몽골 #2나 블랙윙 602 같은 — 을 한꺼번에 깎아 두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하루에 몇 자루를 깎았는지는 기록마다 엇갈립니다. 아들 톰 스타인벡은 24자루라고 회고했지만, 정작 스타인벡 자신은 하루에 “최소 60자루”를 쓴다고 적었습니다. 다만 정확한 숫자보다 중요한 건, 그가 글을 쓰는 도중에 연필을 깎느라 흐름이 끊기는 걸 못 견뎌 했다는 점입니다.

1968년 스타인벡 사후 『에덴의 동쪽』 집필 일기(Journal of a Novel: The East of Eden Letters)에서 발췌·편집해 실은 글이 실린 1969년 파리 리뷰 기사에는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내가 하루에 쓰는 연필 수 — 몇 개인지 모르지만 최소 60자루는 되는데 — 를 손으로 깎으면 시간도 오래 걸리고 손이 피곤해진다. 그래서 한꺼번에 다 깎아 두고 그날은 다시 안 깎는 게 좋다.”

“…the number of pencils I use every day, I don’t know how many but at least sixty … I like to sharpen them all at once and then I never have to do it again that day.”

그는 전동 연필깎이를 두고 “지금까지 내가 쓴 물건 중 가장 많이 쓰고 가장 도움이 된 것”이라고까지 했습니다. 뾰족한 연필과 무뎌진 연필을 각각 다른 연필꽂이에 나누어 두고, 준비해 둔 것을 한 자루씩 바꿔 가며 썼다고 하죠. 연필을 깎는 일은 글쓰기 전의 의식이었지만, 정작 글을 시작한 뒤에는 그 의식조차 생각을 방해하지 않도록 미리 끝내 둔 셈입니다.

저도 여러 자루를 미리 깎아 집 안 곳곳에 놓아두고 씁니다. 어릴 때 쓰던 미제 전동 연필깎이의 품질을 요즘은 다시 구하기 어려운데, 대신 요즘 애용하는 것은 칼 사무기(カール事務器)의 Angel 5 Royal 3라는 연필깎이입니다.

빈티지 칼 연필깎이 클로즈업
레트로 감성이 돋보이는 칼(CARL) 연필깎이. 클래식한 디자인과 견고한 금속 디테일이 인상적입니다.

이 제품으로 깎으면 나무와 심의 경계가 ‘사람 인(人)’ 자처럼 완만한 곡선을 이루면서 길고 예리한 촉이 만들어집니다. 연필에 약간의 자국이 남는 건 아쉽지만, 큰 힘을 들이지 않고 부드럽게 깎이는 감각이 좋아 계속 쓰고 있습니다. 이 연필깎이에 관해서는 언젠가 따로 자세히 다뤄보고 싶습니다.

“사랑을 쓰려거든 연필로 쓰세요.”

연필의 장점은 지울 수 있다는 점입니다. 단점이기도 하지만 말이죠.

블랙윙 602 연필과 모노 지우개
기본에 충실한 필기 도구의 조합. 블랙윙 602 연필과 모노 지우개가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유명한 가요에서도 말하듯이, 쓰다가 틀리면 지우개로 고쳐 쓸 수 있다는 점이 연필의 미덕입니다. 틀릴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생각을 자유롭게 뻗어 나가게 해 준다는 점에서, 지울 수 있다는 건 아이디어 노트나 일상 메모에 꽤 큰 미덕입니다.

물론 연필이 만능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저 역시 볼펜을 비롯한 여러 필기구를 씁니다. 다만 생각을 굴리는 동안만큼은, 고칠 수 있다는 사실이 주는 여유가 큽니다.

그런 점에서 팔로미노의 블랙윙 602처럼 꽁무니에 지우개를 단 연필은 든든합니다. 쓰고 고치는 일을 한 자루로 끝낼 수 있으니까요. 물론 저는 연필에 달린 지우개보다 사진 속 톰보 모노 지우개를 더 즐겨 씁니다.

의외로 오래가는 필적

종류와 보관 환경에 따라 다르겠지만, 오래된 볼펜 필적 중에는 빛을 받아 색이 옅어지거나 변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래 남겨야 할 기록이라면 필기구의 내광성과 보존성도 한 번쯤 따져 볼 만합니다.

그렇다고 연필이 공문서나 서명에 어울린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지우고 고칠 수 있다는 바로 그 성질 때문에, 오히려 연필을 써서는 안 되는 문서가 많죠. 다만 개인적인 기록의 보존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연필 필적은 생각보다 끈질깁니다.

중학생 때 연필로 쓴 일기장을 펼치면 그때의 글씨가 지금도 거의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물이 닿아도 잉크처럼 쉽게 번지지 않는 것도 재미있죠(대신 젖은 종이에는 쓸 수 없다는 건 몇 안 되는 단점입니다). 종이만 잘 간수하면, 가볍고 흐릿해 보이는 흑연의 흔적도 꽤 오래 버틴다는 걸 그 일기장을 볼 때마다 실감합니다.

깎을 때의 느낌과 쓸 때의 느낌

연필을 쓰면 종이와 심이 스치는 감각을 피할 수 없습니다. 흑연심이 종이 위를 미끄러지며 내는 사각사각한 소리와 촉감은 다른 필기구에서 얻기 어려운 각별함이 있습니다. 손끝에 닿는 나무의 질감도 그렇고요.

연필을 쓰면 결국 깎게 되는데, 저는 그 순간을 소중히 여깁니다. 칼날이 흑연과 나무를 조금씩 밀어낼 때의 감각, 그리고 고급 연필에 흔히 쓰이는 캘리포니아산 향삼나무(인센스 시더)가 깎이며 풍기는 향은 뭐라 형언하기 어렵습니다.

연필은 이처럼 청각과 촉각, 후각과 시각으로 분명한 피드백을 돌려주는 필기구입니다. 저는 이 감각들이 그저 기분 좋은 부수 효과에 그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손에 닿는 도구의 감촉과 반복되는 작은 동작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제 생각을 정리하겠다’는 상태로 스스로를 데려다 놓습니다.

도구의 물리적 감각이 정신을 특정한 상태로 조율한다는 생각은 독서에도 통합니다. 애니메이션 『PSYCHO-PASS』의 마키시마 쇼고는 책을 단순히 글자를 읽는 매체가 아니라, 손가락에 닿는 종이와 페이지를 넘기는 감각으로 정신을 조율하는 도구로 이야기합니다. 그 인물의 세계관에 전적으로 동의할 생각은 없지만, 페이지를 넘기는 감각이 독서 경험의 일부라는 말에는 공감합니다.

연필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무를 쥐고, 종이에 심을 문지르고, 무뎌진 촉을 다시 깎는 일련의 감각은 생각의 내용과 무관한 장식이 아닙니다. 때로는 바로 그 감각이 생각을 시작하게 하고, 이어 가게 하는 작은 장치가 됩니다.

여러분도 시작해 보세요

이쯤 되면 여러분도 연필을 한번 써 보고 싶어지지 않으십니까?

거창한 글을 쓸 필요는 없습니다. 장보기 목록, 할 일, 통화 중의 메모, 글을 쓰기 전 떠오른 단편적인 생각부터 적어 보면 됩니다. 잘못 쓰면 지우고, 마음이 바뀌면 고쳐 쓰고, 한쪽 구석에 선을 긋거나 동그라미를 쳐도 그만입니다.

저 역시 대부분의 글은 컴퓨터로 씁니다. 검색하고, 고치고, 저장하고, 공유하는 일이라면 디지털이 압도적으로 빠르니까요. 그런데 연필은 디지털이 대신하기 어려운 다른 일을 합니다. 쓰는 속도를 생각의 속도에 맞추고, 손의 감각으로 정신을 한곳에 붙들며,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생각도 부담 없이 종이에 올려놓게 합니다.

연필은 옛 물건이라서 좋은 게 아닙니다. 지금도 생각하는 사람에게 쓸모 있는 도구라서 좋습니다. 잘 깎은 연필 한 자루와 종이 한 장을 앞에 두고, 완성된 문장 대신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생각부터 적어 보세요. 지금까지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릅니다.

푸른곰
푸른곰

푸른곰은 2000년 MS의 모바일 운영체제인 Pocket PC 커뮤니티인 투포팁과 2001년 투데이스PPC의 운영진으로 출발해서 지금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2005년 이후로 푸른곰의 모노로그를 운영하고 있으며 지금은 주로 애플과 맥, iOS와 업계 위주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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