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필로 쓰는 것의 즐거움
학생 시절, 중고등학생 시절을 걸쳐 저는 학급 서기를 했습니다. 그렇게 된 계기는 초등학생 시절에 경필 쓰기(=연필 글쓰기)에서 상을 탄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는 이제는 컴퓨터로 더 많은 글을 쓰고, 연필 보다 샤프 펜슬을, 샤프 펜슬 보다는 볼펜을 더 많이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침대 맡과 책상에 메모를 할 공책과 깎아 둔 연필을 늘 두고 있습니다. 아이디어를 적을 때, 메모를 적을 때, 가장 스트레스가 적다고 생각하는 필기구는 역시 연필입니다.
어디선가 본 연필을 찾아서…
저는 보통 미츠비시나 톰보연필의 연필을 깎아서 썼습니다만, 아시다시피 이들의 연필에는 보통 지우개가 없습니다. 지우개가 달린 미국식 #2 연필을 찾아본 적도 있는데요. 어떤 유튜브 영상에서 출연자가 사용하는 커다란 지우개가 달린 연필을 보고 몇년 전에 봤던 $40 짜리 연필에 대한 동영상이 떠올랐습니다.
블랙윙 602의 전설
그 출연자가 사용했던 연필, 그리고 위의 유튜브 영상에서 나오는 연필인 블랙윙 602에는 마치 몰스킨(Moleskine) 공책과 같은 일종의 스토리가 있습니다. Eberhard Faber라는 회사가 내놓은 블랙윙 602 연필은 작가 존 스타인벡, ‘벅스 바니’로 유명한 루니 툰스의 척 존스, 레너드 번스타인, 퀸시 존스 등이 사랑하기로 유명했습니다. 특히 존 스타인벡은 매일 아침 비서에게 블랙윙을 수십 자루씩 미리 깎게 할 만큼 이 연필에 집착했다고 합니다. 크게 힘 주지 않고도 부드러우면서, 진한 선을 그려낼 수 있으면서도 당시 2B 연필처럼 쉽게 무너지거나 번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제품은 “Half the Pressure, Twice the Speed”라고 소구 했습니다. “필압을 살짝만 실어도 매끄럽게 미끄러지고, 길게 써도 피로가 덜 쌓인다”고 연필 매니아 사이에서 인기를 끌게 됩니다. 그러했던 블랙윙 연필은 이 회사 저 회사에 매각되기를 반복하다가 출하량 감소가 이어지는 가운데, 페룰(지우개와 연필을 연결하는 부분)을 고정하는 기계가 고장나는 바람에 90년대 말에 단종되는 어처구니 없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한 자루에 $40짜리 연필’
그리고 사람들은 이 연필을 찾아 이베이(eBay) 등지를 뒤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한 자루에 40달러까지 치솟게 됩니다. 이 와중에, 미국의 한 사업가는 2010년대에 이것을 기회로 보았고, ‘블랙윙’ 상표를 사들입니다. 그리고 일본으로 날아가 흑연 배합의 시행착오 끝에 캘리포니아산 향삼나무(Incense Cedar)를 사용한 블랙윙 602의 재현품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합니다.
엄밀히 말해 다른 제품

엄밀히 말해서 지금 판매 되는 블랙윙 602 연필은 마치 몰스킨 공책이 그러했듯이, 직접적인 계보를 잇지는 않습니다. 원래 블랙윙 연필을 만들었던 회사가 흑연/점토와 왁스의 성분과 비율을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지금 만든 연필은 최대한 그 감각을 재현하기 위해 흑연과 점토, 왁스의 성분을 조절해서 저마찰/고농도 필기감을 내도록 ‘흉내’낸 것이죠. 물론, 그 상징적인 지우개와 함께 말입니다.
연필 한 자루가 순식간에 몽당연필이 되는 매력
저는 블랙윙 연필 한 다스를 샀고, 늘 그렇듯이 책상과 머리맡에 공책과 두었습니다. 침대 밑에는 소형 연필깎이를 두었습니다. 그렇게 생각이 미칠 때마다 메모를 했고, 연필 한 자루가 순식간에 짧다막하게 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까지 제가 연필을 쓴 것은 아마 초등학생 시절 경필 쓰기를 연습하던 시절 이래가 아닐까 싶은데요.
물론, 글을 쓰고, 메모를 하고, 노트를 하는 것에는 볼펜이나 샤프 펜슬 등 ‘현대적인’ 도구가 더 많이 있습니다. 게다가 연필 중에서도 한 자루에 3,500원(즉, 한 다스에 42,000원)하는 괴악한 가격의 연필이 아니어도 될지 모릅니다.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고 누군가 그랬잖습니까? 하지만, 저는 붓을 가리는 성격이고, 연필을 깎아서 글을 쓸 때마다 향삼나무의 향기를 맡으며 글쓰기를 즐기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