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 한 자루에 3,500원을 쓴다는 것 – 블랙윙(Blackwing) 602

검은색 연필과 분홍색 지우개

연필로 쓰는 것의 즐거움

학생 시절, 중고등학생 시절을 걸쳐 저는 학급 서기를 했습니다. 그렇게 된 계기는 초등학생 시절에 경필 쓰기(=연필 글쓰기)에서 상을 탄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는 이제는 컴퓨터로 더 많은 글을 쓰고, 연필 보다 샤프 펜슬을, 샤프 펜슬 보다는 볼펜을 더 많이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침대 맡과 책상에 메모를 할 공책과 깎아 둔 연필을 늘 두고 있습니다. 아이디어를 적을 때, 메모를 적을 때, 가장 스트레스가 적다고 생각하는 필기구는 역시 연필입니다.

어디선가 본 연필을 찾아서…

저는 보통 미츠비시나 톰보연필의 연필을 깎아서 썼습니다만, 아시다시피 이들의 연필에는 보통 지우개가 없습니다. 지우개가 달린 미국식 #2 연필을 찾아본 적도 있는데요. 어떤 유튜브 영상에서 출연자가 사용하는 커다란 지우개가 달린 연필을 보고 몇년 전에 봤던 $40 짜리 연필에 대한 동영상이 떠올랐습니다.

블랙윙 602의 전설

그 출연자가 사용했던 연필, 그리고 위의 유튜브 영상에서 나오는 연필인 블랙윙 602에는 마치 몰스킨(Moleskine) 공책과 같은 일종의 스토리가 있습니다. Eberhard Faber라는 회사가 내놓은 블랙윙 602 연필은 작가 존 스타인벡, ‘벅스 바니’로 유명한 루니 툰스의 척 존스, 레너드 번스타인, 퀸시 존스 등이 사랑하기로 유명했습니다. 특히 존 스타인벡은 매일 아침 비서에게 블랙윙을 수십 자루씩 미리 깎게 할 만큼 이 연필에 집착했다고 합니다. 크게 힘 주지 않고도 부드러우면서, 진한 선을 그려낼 수 있으면서도 당시 2B 연필처럼 쉽게 무너지거나 번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제품은 “Half the Pressure, Twice the Speed”라고 소구 했습니다. “필압을 살짝만 실어도 매끄럽게 미끄러지고, 길게 써도 피로가 덜 쌓인다”고 연필 매니아 사이에서 인기를 끌게 됩니다. 그러했던 블랙윙 연필은 이 회사 저 회사에 매각되기를 반복하다가 출하량 감소가 이어지는 가운데, 페룰(지우개와 연필을 연결하는 부분)을 고정하는 기계가 고장나는 바람에 90년대 말에 단종되는 어처구니 없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한 자루에 $40짜리 연필’

그리고 사람들은 이 연필을 찾아 이베이(eBay) 등지를 뒤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한 자루에 40달러까지 치솟게 됩니다. 이 와중에, 미국의 한 사업가는 2010년대에 이것을 기회로 보았고, ‘블랙윙’ 상표를 사들입니다. 그리고 일본으로 날아가 흑연 배합의 시행착오 끝에 캘리포니아산 향삼나무(Incense Cedar)를 사용한 블랙윙 602의 재현품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합니다.

엄밀히 말해 다른 제품

블랙윙 602 연필 세트

엄밀히 말해서 지금 판매 되는 블랙윙 602 연필은 마치 몰스킨 공책이 그러했듯이, 직접적인 계보를 잇지는 않습니다. 원래 블랙윙 연필을 만들었던 회사가 흑연/점토와 왁스의 성분과 비율을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지금 만든 연필은 최대한 그 감각을 재현하기 위해 흑연과 점토, 왁스의 성분을 조절해서 저마찰/고농도 필기감을 내도록 ‘흉내’낸 것이죠. 물론, 그 상징적인 지우개와 함께 말입니다.

연필 한 자루가 순식간에 몽당연필이 되는 매력

저는 블랙윙 연필 한 다스를 샀고, 늘 그렇듯이 책상과 머리맡에 공책과 두었습니다. 침대 밑에는 소형 연필깎이를 두었습니다. 그렇게 생각이 미칠 때마다 메모를 했고, 연필 한 자루가 순식간에 짧다막하게 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까지 제가 연필을 쓴 것은 아마 초등학생 시절 경필 쓰기를 연습하던 시절 이래가 아닐까 싶은데요.

물론, 글을 쓰고, 메모를 하고, 노트를 하는 것에는 볼펜이나 샤프 펜슬 등 ‘현대적인’ 도구가 더 많이 있습니다. 게다가 연필 중에서도 한 자루에 3,500원(즉, 한 다스에 42,000원)하는 괴악한 가격의 연필이 아니어도 될지 모릅니다.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고 누군가 그랬잖습니까? 하지만, 저는 붓을 가리는 성격이고, 연필을 깎아서 글을 쓸 때마다 향삼나무의 향기를 맡으며 글쓰기를 즐기고 있습니다.

푸른곰
푸른곰

푸른곰은 2000년 MS의 모바일 운영체제인 Pocket PC 커뮤니티인 투포팁과 2001년 투데이스PPC의 운영진으로 출발해서 지금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2005년 이후로 푸른곰의 모노로그를 운영하고 있으며 지금은 주로 애플과 맥, iOS와 업계 위주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기사 : 24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