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HHKB Studio는 2022년에 컴퓨터 등으로 유명한 후지츠(富士通;Fujitsu)에서 복사기 등 문서 솔루션으로 유명한 리코(リコー;Ricoh)로 주인이 바뀐 다음 PFU가 처음으로 내놓은 HHKB의 본격 신제품입니다. 2022년에 리코로 주인이 바뀐다기에 저는 “아, 이 친구들 키보드 사업은 접겠구나” 라는 이상한 걱정에 휩싸였고, 결국 당시 플래그십 기종이던 HHKB Professional Hybrid Type-S를 2대 더 쟁여 놓기에 이르지요(도합 3대). 그래도 리코에 인수된 이후에도 PFU는 키보드 사업을 포기 할 생각은 없습니다라는걸 보여주려는 듯이 간간히 기존 모델의 컬러 배리에이션 정도만 내놓다가 작년 10월에 완전히 새로운 제품을 내놓았습니다.
이 모델은 정말로 많은 것이 변했는데. 일단 외관부터가 예전의 레트로한(?) 해피해킹과 차이가 있습니다. 기획부터가 캘리포니아에 있는 PFU의 미국 지사에서 이뤄졌고, GoPro등의 디자인에 참여한 미국의 디자인 펌 Huge Design LLC社와의 협업을 통해서 만들어졌다고 하며, 그런 까닭에 누가봐도 투박한 ‘메이드 인 저팬’ 제품이었던 이전 시리즈와는 달리 비교적 시대에 걸맞는 세련된 디자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최소한 건전지함이 (눈치없이)볼록 튀어나오는 구조는 드디어 철폐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전지를 사용하는 구조는 변함이 없죠. 아니 오히려 건전지 갯수가 AA 2개에서 4개로 늘어 났습니다. 전지함을 안쪽으로 수납하다보니 결국 본체 크기가 커졌다는 것 또한 당연히 언급해야할 사실이구요. 이러한 사실은 이 제품이 가진 여러가지 양면성의 한 단편에 불과합니다.
이 제품은 출시 발표 이후, 여러 논란을 일으키면서도 2023년 10월 발매 후 거의 다섯 달 가까이 품귀 현상을 빚어야 했고, 제가 살 때 즈음 해서야 겨우 직판 사이트를 위주로 공급이 안정된 느낌인데요, 사람들은 왜 이 제품에 그렇게 열광을 한 것일까요?
해피해킹에서 정전용량을 빼면?
보통 HHKB(해피해킹키보드)를 설명할 때는 처음으로 시작 하는 게 ‘60% 사이즈의 정전용량 무 접점 스위치를 채용한 키보드’인데, 이 제품의 경우 60%의 HHKB 레이아웃은 그대로입니다만, 더 이상 사람들이 해피해킹하면 떠올리는 토프레 정전용량 무 접점 스위치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 제품이 나왔을 때 사람들이 꽤나 충격을 받았던 것은 미국 물 잔뜩 먹은 디자인이나 나중에 설명해드릴 포인팅 스틱, 그리고 제스처 패드의 존재보다도 ‘HHKB가 기계식 스위치를 썼다고?’ 라는 점 때문이었을 겁니다. 이 제품은 지난번에 소개해드렸던 로지텍 MX Mechanical 시리즈에도 채용된 카일 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만, 초기 리뷰에서 여럿 지적되었지만 커스텀해서 발주한 탓인지, 기존의 어떤 카일 축을 사용한 스위치와도 타건감이나 타건음이 다르다고 하고요. 자작 키보드 매니아들이 비슷한 스위치 찾기를 나섰지만, 그 마저도 얼마잖아 흥이 깨진 게 카일 뿐 아니라 어떤 회사에서도 비슷한 축을 내놓지 않았을 뿐더러 그냥 대놓고 MX 3축/5축 호환 스위치를 PFU가 멀쩡하게 발매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PFU가 주문해서 카일이 OEM 생산한 축이다, 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마치 토프레축을 OEM한 기존 HHKB처럼 말이죠. 키는 리니어한 느낌으로 딸깍딸깍 걸리는 느낌이 없고 소음이 생각보다 굉장히 적어 밤 늦은 시간대에 두드려도 크게 지장이 없을 수준으로, 다른 기계식 키보드는 물론이고 다른 HHKB에 비해서도 고음 성분이 많이 줄어들어 있습니다. ‘진정한 Type-S’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조용합니다.
아마 여러분께서 이 제품에서 제일 신경 쓰일 부분은 타이핑감(타건감)일 텐데요. 솔직히 키를 눌렀을 때 소리가 변화한 것 외에는 크게 기존에 쓰던 HHKB 프로페셔널과 커다란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겠습니다. 스펙상으로는 3.8mm 들어가던 키 스트로크가 3.6mm로 0.2mm, 본래 4mm던 HHKB 프로페셔널 2에 비해서 0.4mm 줄어들었지만. 글쎄요. 처음 쳐봤을 때 위화감이 생각보다 없어서 누가 봐도 명확하게 다른 키를 칠 때 나는 소음 성분을 제거하고 비교해보려고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에 음악을 켜고 눈을 감고 두대의 키보드를 번갈아 쳐보기까지 했습니다. 그 정도입니다. 저는 적지 않은 금액을 주고 산 기계식 키보드를 몇 대 가지고 있지만 결국 어느새 정신 차려보면 묘한 위화감 때문에 HHKB로 돌아와 있었는데요, 이 제품을 쓰면서는 이상하게 전혀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습니다. 네, 맞습니다. 이 키보드는 기계식이지만 한편으로 HHKB인 것입니다.
이 제품의 키는 체리 MX 호환 키 톱과 키 스위치와 호환이 됩니다. 스위치는 앞서 말씀 드렸듯이 여벌 10개들이를 3300엔(세금 포함)에 판매 중이고, 키 톱의 경우 스페이스바가 좀 특이하고, 포인팅 스틱 때문에 완벽하게 호환되지는 않겠지만, 그런 점을 고려했는지 PFU가 3D 프린팅용으로 키 톱의 데이터를 공개했습니다. 대놓고 ‘상업 이용 가능’ 이라며 제품화해도 된다고 하고 있으니, 시간이 지나면 알리 같은 중국 통신판매 사이트에 염가로 호환 키 톱을 구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군요. 이미 해외에서는 다양한 키 톱을 끼워서 커스텀 하거나 심지어는 스위치를 전부 다 자기가 좋아하는 키 스위치로 갈아서 사용하시는 분도 계시더군요.
자, 이렇게 다 좋은 것 같은데, 문제가 있습니다. 저는 첫번째 HHKB를 16년 사용했습니다. 이러한 긴 수명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정전용량 무 접점 구조로 최소 3000만회 이상을 견디는데요. 메커니컬 키의 경우에는 아주 특이한 키를 제외하고는 수명이 정해져 있습니다. 다른 건 차치하고 이 키보드의 키 수명은 600만회 정도라고 합니다. 1/5가 되어 버렸어요. 게다가 수명을 5년 정도로 보고 있다고 하더군요. (이에 대해 문의해본 결과, 키 수명은 줄었으나 정전용량시절과는 달리 스위치를 교체할 수 있고, 전용 스위치를 별도로 공급하고 있으므로 고장난 키를 교체하면 문제 없을 것이라는 회답을 받았습니다)
이 제품의 셀링 포인트로 “서부의 카우보이는 말(컴퓨터)가 죽어도 안장(키보드)는 안고 간다” 라는 도쿄대 명예교수로 HHKB의 최초 개발에 관여하신 와다 에이이치 선생이 했다는 멋진 말이 있습니다만, 이러다간 자칫하면 안장이 말보다 먼저 요절하겠다는 우려를 하게 됩니다.
뭐, 하나의 기판에 모든 키가 연결되어, 키 하나가 죽어도 기판을 통째로 갈아야 했 정전용량 무 접점 시대와 지금을 비교하는 것은 불공평하다는 분도 계실 것으로 압니다. 여차하면 고장 난 부분부터 별도로 판매하는 순정 키 스위치를 교체하거나 다른 키 스위치 메이커의 제품으로 교환도 가능하니까요. 물론 예전처럼 한 기기가 오래오래 쓸 수 있다면 참 좋을텐데, 이 문제는 생각하기 나름인 것 같습니다. 문자 그대로 기계적으로 동작하는 메커니컬 키보드가 된 이상 받아들여야 할 숙명인지도 모르죠.
2024/2/7 추가: 일본쪽 뉴스 사이트에 따르면 이번 기종에 사용된 카일 축은 1억회를 견딜 수 있으며 PFU 측도 최소한 정전 용량 무 접점 수준인 3천만회 정도는 시험을 했다고 합니다. 왜 저렇게 공표 했는지는 알 도리가 없지만요.
2024/2/18 추가: PFU측의 회신을 추가.
이제는 단순한 키보드가 아니다
홈페이지나 프로모션 비디오를 보건데 이 제품의 셀링 포인트는 키보드의 홈 포지션에서 움직이지 않고, 변화무쌍한 ‘창조 활동’에 임할 수 있다는 것 같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마우스를 대신하기 위한 포인팅 스틱(ThinkPad에서 TrackPoint라고 부르는)이 들어갔고, 슬라이드 제스처를 인식하는 제스처 패드가 4구석을 감싸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기능들을 대충 하루 정도 사용해본 결과, 이 제품은 비디오 편집이나 이미지 편집 같은 것을 하는 코어한 크리에이터보다는 역시 키보드를 중심으로 글을 쓰는 작업을 하는 사용자에게 더 어울립니다. 제가 이 제품을 처음 두드려보고 포인팅 스틱을 움직여 보고 클릭을 하면서 느꼈던건 “옛날 ThinkPad를 쓰는 것 같다’ 라는 것이었거든요. 비즈니스 노트북의 왕이었던 ThinkPad에 옛날에 채용되었던 것 같은 포인팅 스틱이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죠. 게다가 오리지널 ThinkPad X1에서 두께 문제로 삭제된 포인팅 스틱을 두드리면 클릭이 되는 기능마저 채택을 해서 정말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었습니다. 키보드로 입력을 하면서 문자 선택을 하거나, 복붙을 하거나 할 때 저는 ThinkPad에서는 키보드 화살표키보다 포인팅 스틱을 더 많이 썼습니다. 그 정도로 홈 포지션을 무너뜨리지 않으면서도 빠르게 쓸 수 있거든요. 제가 포인팅 스틱을 처음 쓴것이 90년대기 때문에 HHKB가 제 반생을 같이한 키보드라면, 포인팅 스틱은 마우스와 함께 제 반생을 같이한 포인팅 디바이스인지라 매우 편했습니다. 거기에 더해서 HHKB의 Ctrl키의 위치가 안그래도 특등석이기 때문에, 복붙하는 작업에 있어서는 효율이 말도 안되게 올라갔습니다. HHKB Studio에는 마우스 용으로 버튼이 3개 할당 되어 있는데(가운데가 Fn2로 평시에는 스크롤을 할 때 사용) 이 모두 로우 프로파일 갈축 기계식 스위치라 원조 싱크패드보다도 훨씬 내구도가 높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누를때 느낌도 장난이 아니에요! 제가 쓰던 ThinkPad X1 Yoga의 트랙포인트 왼쪽 버튼이 채터링을 일으킬 정도로 많이 썼기 때문에 저에게는 정말 좋은 기능 추가였습니다. 아마 ThinkPad를 좋아하셨던 분이라면 이 포인팅 스틱은 정말 좋아 하실겁니다. 레노버에서 UltraNav 키보드를 따로 내놓을 정도고, 그걸 사서 쓰시는 분들도 계실텐데 어쩌면 선택지가 하나 늘었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그외에 제스처 패드가 있습니다만, 솔직히 많이 사용하지 않고 이따금 원치 않은 입력을 해서 성가실 때가 있지만(역으로 원할 때 잘 안들을 때가 간혹 있습니다) 스크롤이나 창 전환 등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있으니 편하더군요. 뭐 광고에서는 이걸 이용해서 멋지게 동영상 편집을 하고 오디오 편집을 하고 이미지 편집을 하고 그럽디다만서도 저는 애석하게도 셋 다 안하기 때문에 기본값인 화살표키와 스크롤, 태스크 스위치 기능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지금 현재는 Backspace/Delete만 변경해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나중에 본격적으로 키 매핑을 연구하게 되거든 그때 곁들여서 다른 활용법을 궁리해봐야죠.
이 제품의 초기 리뷰에서 이 포인팅 스틱(특히 맥에서)과 제스처 패드의 감도와 정확도에 불평이 많이 있었던 걸 봤는데요. 제가 사용하는 시점(펌웨어 B0.7)에서는 어느 시스템에서나 불만 없이 빠르고 정확하게 원하는 걸 선택해서 작업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걸로 일러스트레이터나 포토샵에서 패스를 딸 수 있느냐? 그건 별개라고 생각합니다. 애당초 포인팅 스틱이라는 게 그런 거 하라고 개발한 거 아니잖습니까? 해서, 많은 사람들이 보통 해피해킹 키보드를 휴대하더라도 마우스나 트랙볼을 같이 휴대하거나, 아니면 컴퓨터의 터치패드를 억지로 쓰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물론 데스크톱인 경우에는 말할 나위가 없고 말이죠.
커지고 무거워졌다
앞서서 말씀드렸지만, 디자인은 굉장히 세련되어졌습니다만, 기계식 키보드로서 AA 배터리만으로 포인팅 스틱 등 추가 기능 등을 지원하고 기계식 스위치들에게 밥을 충분히 주기 위해서 AA 배터리 개수가 2개에서 4개로 늘어났습니다. 그리고 타이핑할 때 정음감과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서 철판이 들어가 있는데, 그 탓에 무게가 엄청 올라갔습니다. 배터리 안 넣고 840g에, 배터리까지 넣으면 거의 1kg에 육박하게 됩니다.
또, 앞서 말씀 드렸다시피 마우스 버튼의 추가와 더불어 배터리 박스까지 깔끔하게 포함하도록 디자인이 변경된 까닭에 기존에 HHKB Professional 시리즈에서 사용하던 모든 정품 케이스가 거의 사용할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새로 사야하는데, 이것도 한 가격하는지라… 고민이 큽니다. 게다가 직판 사이트에서만 판매하고 있다는 점도 문제고요. 지금 현재 저는 커다란 천에 키보드를 칭칭 싸서 보관/이동하고 있습니다.
해서, 메이커 설명 대로라면 마우스를 들고 다니지 않게 되어 좋은데… 무게로 보면 키보드에 마우스가 추가된 것 같은 느낌이죠.
첫인상을 마치며
이 제품을 받아서 처음 사용한 지 이제 하루하고 몇시간이 지났습니다. 다른 곳에 있는 컴퓨터를 오갈때 마다 이 키보드를 옮겨 가지고 다니면서 사용하고 있는데요. 키보드 자체도 훌륭하지만 포인팅 스틱이 저를 끌어당기는 느낌입니다. 특히 노트북을 사용하면서 터치패드를 사용하느냐 별도의 마우스를 사용하느냐 선택을 반쯤 강요 당한 상황에서 HHKB Studio는 저에게 아주 행복한 선택지였습니다. 가격이 4만 4천엔(세금 포함)이라는 점이 문제인데… 저로써는 투자해서 행복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장점:
- HHKB라는 이름에 부끄러움 없는 변함없이 훌륭한 키감.
- HHKB Professional 시리즈와 완벽하게 같지는 않으나 1일 이내 적응 가능할 정도로 어색함이 적은 타이핑감.
- 스위치와 내부 구조의 변화로 인해 더 조용해진 타건음.
- 베이스에서 1mm도 움직이지 않고 마우스 조작이 가능한 포인팅 스틱과 포인팅 스틱 버튼.
- 훨씬 많은 커스텀이 가능해진 키 매핑 툴.
- 만약 원한다면 이제 원하는 스위치와 키 톱으로 자유자재로 커스텀이 가능해졌다.
단점:
- 크고 무겁다.
- 가격이 비싸다.
- 수명에 대한 의구심이 남는다.
- 건전지를 기존 기종에 비해 2개나 더 넣는데, 사용시간은 스펙상 늘지 않았다.
- 제스처 패널은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좋았을 것이다. 특히 앞면 제스처 패널은 손바닥을 잘못 인식해서 골치.
- 사람에 따라서 더 이상 Made in Japan이 아니라는 점이 실망스러울지도.
- 익숙해지면 이 키보드밖에 쓰기 싫을겁니다. 휴대를 위해 케이스를 미리 준비하세요. 아니면 자주 쓰는 곳에 놓을 키보드를 하나 더 사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