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강했다. 방학동안에는 거의 연락 안하고 지냈지만 그래도 막상 만나니 반가운게 학교 사람들이다. 작년 한해 동안 교환교수로 가있던 교수님도 만나고, 지난번에 점수 잘주셨던 교수님도 만나고… 그외에도 아는 얼굴들을 ‘입~빠이'(죄송하다 지금 내 머리에서 이 이상의 어감을 재현하는 단어가 떠오르질 않는다) 만났다. 수업도 많이 들었다. 지난 학기에 수업을 들었던 교수님 수업을 또 듣게 생겼는데, 교재마저 똑같아서 돈이 굳게 생겼다(이 교재는 휴학하기 전에 샀었던 것인데… 3년전에 샀는데 또 써먹는다… 징하게 본전 뽑는다). 나머지 수업도 괜찮았다. 재미있을 것 같다.
다만 좀 힘들었다. 일단 점심 식사를 못한채 10시부터 17시까지 스트레이트로 수업을 들어야 했다. 점심을 먹지 못한 것은 이유가 있는데, 지난 학기부터 같은 수업을 듣게되면서 잘 알게된 다른 과의 선배가 있었는데, 같이 점심을 먹자고 해서 일부러 안먹고 기다리고 있었더랬다. 그런데 왠걸… 선배가 나타난건 식사를 먹기에는 너무 늦어버린 시간… 간신히 몇마디 나누고 나서 마저 수업을 들어야 했다. 덕분에 그날 첫 식사를 여섯시 가까운 시간에 했다. 뭐 어찌됐던 이날은 입학식도 겸했는데. 입학식은 세번을 접해봤지만. 별 감흥은 없다. 다만, 시간이 갈때마다 내가 선배라고 부를 풀(pool)은 줄어들고 있고, 후배라고 부를 사람들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치 TV에서 노래부르는 아이돌 가수가 나보다 어리다는걸 아는 것만큼이나 89년생 신입생을 보면서 씁쓸하다 조금.
아무튼 그 때 즈음해서 장쯔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보자는 것이다. 오늘. 원래는 방학의 끝날을 같이 하기 위해서 며칠전부터 교감이 있었던 것을… 장쯔측의 사정으로 이 주 언젠가로 미뤘다가 또 그게 여의치 않자 급하게 만나게 된것이다. 장소는 수원. 사실 수원에 가는건 간단해서 학교에서 5분쯤 걸어가면 수원까지가는 버스를 타는 정류장이 나온다. 그곳에 10분이 멀다하고 한대씩 배차되는 좌석버스가 각각 3개 노선이 있으니 거의 때때로 온다 보면 된다. 하지만… 장쯔를 만나서 카메라를 설명을 해주기로 했는데 카메라가 없다…. 모처럼 보여주려고 뉴욕책을 사뒀는데 보여줄 수가 없게 된다… 게다가 짐짝도 좀 많다. 그래서 집으로 향했다. 같은 시내에 있어서 그나마 등하교는 편한 편이지만… 그래도 거리가 조금 있는데다 나는 이미 몸이 천근만근이라서 택시를 잡아타고 집에가서 화장실을 쓰고, 양말을 갈아 신은 뒤에, 내려놓을 짐을 내려놓고 렌즈를 세심히 고르고, 카메라와 뉴욕 책을 챙겼다.
그때였다. 엄마가 전화를 했는데, 괜찮다면 수원까지 태워주겠다고 하셨다. 잘됐다 싶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수원 초입에서 차가 무지 밀렸고, 약속에 늦게된 엄마는 짜증을 내기 시작했고 결국은 나는 수원 한가운데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약속장소로 향해야 했다.
준영이는 정말 보기 어려운 친구이다. 7개월만에 보는건데, 연락도 힘들고 아무튼 곡절이 있었다. 그래도 정말이지 그걸 감수해가면서도 보는 몇 안되는 사람이고, 또 그래야할 몇 안되는 사람이기도 하다. 짐작컨데. 마치 ‘별의 목소리’에서 두 주인공이 주고받는 메일처럼 확실하게 그리고 천천히 속도는 느려질 것이다. 학교를 다닐때는 거의 매일 봤고, 졸업을 한 직후에는 몇주에 한번씩 봤고, 아무튼 무슨 사건이 터질때마다 시간은 점점 길어진다. 그게 기록 경신을 하다가 하다가 연락이 거의 반년 가까이 제대로 통하지 않았고. 그나마 어찌저찌 해서 통해서 만나자는 말이 오간게 한달 전인데 이제서야 보게 되었다. 장난삼아서 대통령이라도 출마하면 영영 못보겠다고 했다. 농담조로 대통령 출마는 하지 마라고 했다. 아무튼, 준영이는 유학을 거의 확심하고 있기때문에 다음에는 2년이 될 심산이 크다. 그 이상이 될지는 준영이도 아무도 모른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는 내가 잘 안다. 블랙홀. 더 이상의 설명은 불요하다. 관광비자로 갔다가 눌러앉기도 하고, 아예 불법으로 들어가 앉아 사는 나라이다. 유학비자로 갔다가 일자리를 얻어 취업비자로 바꾸고, 그러다가 그린카드를 따고, 말썽없이 돈 잘벌고, 잘 정착할 때 즈음, 이런저런 국적 문제가 걸리적 거리면 미국인으로 귀화 해버리는. 그런 생리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물론 유학비자를 내주는 미국 정부나 본인은 일차적으로는 “미국에서 정착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 더 나은 삶을 영위할 목적”으로 가는 것이지만.
또 당장 26개월의 군대 문제도 존재하고 있다. 흐음. 이쯤되면 7개월은 아무것도 아닌게다. 나는 솔직한 말로, ‘탈-장준영화’를 꿈꿔왔다. 지난 반년은 ‘탈-장준영화’의 몸부림의 시계열이라고 볼 수도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너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까닭에 이제는 너무 위험해진 상황이다. 내 인간관계의 축을 분산해둘 필요가 있었다. 젠장 그렇지만 대학의 인간관계라는게 진물나게 피곤하고 피상적이다. 쌍피군… 분명 과정에서 나름 좋은 사람을 만났고, 여럿 좋은 친구들을 만났지만 내 분산계획은 결과적으로 말해 실패다. 그걸 방학이 되면서 극명하게 깨달았고, 개학하면서 거짓말처럼 다시 이어지는 대학의 인간관계를 보면서 확인했다. 나는 웃는다. 웃는 낫짝에 침을 못뱉는걸 알기 때문에, 혹은 내 속을 감추기 위해서, 혹은 인간관계를 매끄럽게 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기계에 윤활유를 치듯이 웃음을 팔았다. 덕분에 그닥 예쁘지도 않은 웃음이 그나마 훨씬 익숙해졌다. 텔레비전에서 얼마전에 방송했지만, 웃음도 훈련이 필요하다. 그리고 운동을 요한다. 대단히 피곤하다. 얼굴 근육에. 만면에 웃음을 띈 얼굴에 대한 어떤 소설책속 캐릭터를 의식하고 있다. 싱글벙글 웃으면서 여유롭고 모나지 않게 둥글둥글하고 원만한 대인관계를 가진 사람. 다만 그러다보니 내가 너무 만만해보였나보다. 그런 낌새가 종종 느껴지곤한다. 바로잡아야지. 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그래봐야 내가 자연스레 짓는 웃음들에는 비할바가 못되는 듯 하다. 그런 모습은 내가 부대찌개를 먹을때와, 신기한 장난감들을 구경할때(엄마는 내가 코엑스 소니스타일에서 52인치짜리 LCD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블루레이 영상에 만면에 웃음이 가득하며 눈이 초롱초롱했다고 전했다), 그리고 준영이를 봤을때 뿐이라는 것을 나 스스로 느낀다. 이 경우에는 내가 손을 쓰지 않더라도 몸이 알아서 움직인다.
재미있는 일이 또 있었다. 개강을 한 뒤, 첫 공강날, 나와 엄마는 코엑스에 갔는데. 푸드코트 스바로에서 늘상 그렇듯 피자 한쪽과 밋볼소스 스파게티 하나를 집어 먹다가 콜라가 떨어져서 리필하러 캐셔 쪽으로 갔는데 뒤에서 둔탁하게 툭 하고 치는 것 아닌가 고개를 돌려보니 준영이가 있었다. 니가 왜 여깄냐는 말과 함께. 내가 걸어다니는 폴 사인인 까닭에 한 친구와 캠퍼스를 걸어다니자 수도 없이 많은 ‘후배들’에게 인사를 받았는데, 그는 그걸 무척 부러워했다. 실상은 캠퍼스에 아는 사람은 자기가 더 많을 터였고, 실제로 내가 만나는 동안에 그는 세명 가까운 지인과 인사를 하고 나를 소개 시켜줬었다. 음, 내가 말하고 싶은건 내가 걸어다니는 자석 같다는 것이다. 너무나도 눈에 잘 띄기 때문에 끔찍하게도 나는 그들을 못보지만 그들은 나를 너무나도 잘 안다. 그러니 그 사람 많은 주말 코엑스에서 떡하니 아는 사람이 알건체를 하지. 죄는 못짓는다 생각했다. 도망갈 구석이 없을 것이다. 아마도. 물론 내가 알건체를 안하니 역시 그냥 스쳐지나가는 동기나 후배들도 많았고, 심지어는 미소띈 인사마져도 무시해버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분명 예의라곤 뿌리채 좀먹은 것들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적어도 ‘어이고 못알아봤어요.’는 변명이 못될테니까.
아무튼 엄마와 준영이와 나의 삼자 대면은 몇분간 이어졌고 엄마는 늘상 그렇듯이 준영이를 치켜세우고 나를 깎아 내리고(뭐 사실이 그러하니 나는 그저 껄껄 웃었다). 매우 사교적이었고 재미있는 대화가 오갔다. 중요한 사실은 그 몇분의 대화가 내 분위기를 시종 상승시켜줬고. 자칫 폭삭 가라앉을 뻔한 내 기분을 상승시켜줬다. 글을 쓰고나서 보니 수원에서 준영이를 만나고 뭘 했는지를 안적었는데. 뭐 사실 그것보다 중요한것은 만성적인 내 우울함을 확실히 해소시켜주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강력한 엔돌핀이었다. 부정할래야 할 수 없고, 하자니 더 깊어져가는 그런 딜레마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문제는 앞으로 꽤 깊이 고민 해봐야 할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