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T Lex가 페이스북에 대해 말하길

(이 글을 주말에 써놓고 발행하는걸 까먹었다. 그리고 나서 아주 멋지게 페이스북 주가가 무지막지하게 가라앉았더라 -_- 역시 49달러를 낼 가치가 있는 서비스라는 생각이 들었다. )

파이낸셜 타임스의 지면 구독자나, 49달러(!)를 내고 프리미엄 독자가 되면 볼 수 있는 Lex Column이 있는데 18일자 Lex Column에서 페이스북의 장 마감 후 컬럼을 내놨다(말했지만, 가입자만 볼 수 있는 점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대강 요약을 하자면, ‘(주식)시장’의 장점은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가치가  유동성을 띔으로써 가격의 수준을 발견할 수 있고, 그로 인해 합리적인 자본의 할당을 낳는다는 것이다. 허나, 페이스북의 가치라는 것은 금요일에나 정해졌고 종가라는 38달러는 매우 급작스럽게 정해진 것이라는 것이어서 누적된 정보와는 매우 다르다는 것이다. 주식이라는 것은 단순히 주가를 받아들이거나 말거나의 문제가 아니라 그 회사에 대해 평가를 하는것이고 그것이 주식이 수요가 금속과는 달리 주가에 따라 올라가는 것이라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페이스북은 참고지표가 매우 나쁘다는 점이다.

페이스북은 4억2천만주가 거래되었지만 20억주가 아직 미 매각 상태로 남아 있고 페이스북 규모의 회사 중에서 이렇게 많은 규모의 미매각 주식을 가진 회사는 반국영 상태의 석유회사 정도밖에 없다고 한다. 더 심한 것은 그 주식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이득위에 앉아 있고, 휘발성을 만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투자자는 이득을 볼 수도 있지만 그 이득은 풍향의 변화에 따라 위협에 처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일이 잘못되면 결국 주식을 팔수 밖에 없다. 라고. 게다가 2중 주식 구조 때문에 일반적으로 거래되는 주식은 통제권도 전혀 없다.

해서 결과적으로 그 어마어마한 가치의 회사, 매출의 수익구조가 아직 확립되지 않았다. 라는것. 따라서 며칠전까지도 그 가치는 확실치 않았고 지난 몇시간 동안에도 그렇다는게 그 글의 내용이다.

공감되는 내용이다.

애니메이션의 한류를 생각해볼 때

애니메이션의 한류를 생각해볼 때라는 생각을 해본다. 인터넷의 유명한 짤방(이미지)가 있다. ‘애니메이션은 보지만, 난 오타쿠가 아냐!’라고 외치는. 나도 부인하지 않겠다. 내가 오타쿠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어폐가 있는것 아닐까? 굳이 회색을 걷어내고 이분법적으로 본 다면 오타쿠에 해당될 것이다. 현재 애니메이션 대국 일본은 오타쿠 상법에 찌들어 있다. 유감스럽게도 CJ E&M(이제는 더 이상 투니버스가 아니다)의 신동식 씨의 말대로 본고장의 애니메이션도 오타쿠 상법에 편승한 ‘모에’ 애니메이션이 범람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나는 그것이 하나의 트렌드라면 투니버스 또한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사실 그것은 근본적인 대답은 될 수 없다.

투니버스는 근년 아주 재미있는 시도를 하고 있다. ‘와라! 편의점’, ‘안녕, 자두야’, ‘아기공룡 둘리’와 같은 다양한 국산 애니메이션의 제작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매우 커다란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을 뿐더러 국산 애니메이션의 하나의 지평을 거두었다는데 본인으로써도 매우 뿌듯하게 생각하며 신동식씨 자신도 매우 그렇게 생각하는 듯하다.

그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뒷맛이 매우 쇳맛처럼 느껴지는데 이것이 철저히 국내용 애니메이션이라는 것이다. 매우 안타깝지만, ‘편의점’을 보더라도 ‘자두…’를 보더라도 ‘둘리’를 보더라도 우리나라의 실정을 모른다면 해외에서 통할만한 유머코드가 보이지 않는다. ‘아따맘마’가 희안하게 우리나라에서 본국에서 못지않게 우리나라에서 통했던 것은 그 가족관계와 학교 주변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가 우리나라에서도 거의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코드’가 있기 때문이다. ‘짱구’ 또한 그렇다. 하지만 그 셋의 경우에는 왜인지 ‘한국 애니메이션’이라는 강박에 벗어나지 못한다는 인상을 지우지 못하겠다. 다시 말해서 만약 이것을 수출할 수 있을까? 혹여, 수출한다면 외국인은 이 개그 포인트에서 웃을까? 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가령 뽀로로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어느나라 아이도 웃고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 애니메이션이 하청을 넘어서 원작을 가지고 스스로 만들수 있게 되었다면 내수 만이 아니라 수출을 생각해야 할 때이다. 애니메이션의 한류를 만들어야 한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드라마가 수입되어 왔다. 한국사람조차 일본 드라마에 비해 한국 드라마는 한 수 밑으로 쳐줬지만 이제는 일본 TV 방송 편성표를 보면 도대체가 한국드라마 없이는 얘네 방송 펑크 내는거 아냐? 싶을 정도가 되었다(물론 프라임 타임은 아니지만 거의 24시간 방송하는 현실에서… 거의 모든 방송국 홈페이지만 들어가더라도 한국드라마는 하나의 장르로 확립되어 있다).

최근 일본 애니메이션은 갈수록 보는 사람만 보는 오타쿠만의 장르가 되어가고 있다. 만약 한국의 참신한 원작과 그림이 파고 들 수 있다면? 그래서 마치 아줌마 팬들이 한류 드라마를 보고 열광을 하고 나중에는 좀더 젊은 연령의 대중들이 한류에 열광하듯이 한류 애니메이션에 열광한다면? 이는 한국 애니메이션 뿐 아니라 한일 애니메이션 전체의 파이를 키우는 기폭제가 될 것이며 정체된 시장과 고인 물을 해소하는 마중물이 될 것이다. 나는 그런 꿈만 같은 날을 기대한다. 그런 날이 온다면 자연스레 우리나라의 고연령 애니메이션 시장도 맑은 날이 오리라.

덧말. 애니메이션은 필연적으로 타이업 음반판매와 BD/DVD 판매를 동반한다. 이는 다시 말해서 한국 아티스트의 동반 성장을 견인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류 애니메이션’은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다.

투니버스판 도쿄 매그니튜드 8.0을 보고

도쿄 매그니튜드 8.0가 투니버스에서 무사히 종영되었다. 일단 본작에 관한 내용은 추후에 이야기 하도록 하고(사실은 이게 먼저가 되어야 하나, 유감스럽게도 그 당시에는 블로그에 글을 쓰지 않았던 고로 일단 이걸 먼저 하도록 하자), 이 투니버스에서 방영된 ‘투니버스판’ 도쿄 매그니튜드 8.0에 대해서 잠시 한마디 하고자 한다.

보통 ‘더빙판’에 대한 비판이라고 하면 흔한 오타쿠의 난리로 여겨지기 일쑤라 나로써도 참, 깨름직하다. 뭐 대개 내가 보아 온것이, ‘이 목소리가 본인이 생각하는 목소리와 다르다’ ‘이 주인공은 너무 명랑한 톤으로—내지는 그 반대로 연기한다’ 같은 주로 ‘성우’의 연기에 관한 비평이 많은데, 나는 성우에 대한 비평을 하려는게 아니다. 성우는 이미 수많은 지망자가 있고, 육성을 위한 시스템이 있고, 오디션 시스템이 있고, 전속 시스템을 통해 양성되며, 그 후 일정량의 작품을 소화한 후에 프리로 나가서 활동하는 식으로 이미 충분한 양의 성우 풀이 준비되어 있다. 몬스터에만 해도 100명이 넘는 성우가 출연했다. 나는 이번에는 성우에 대한 비평이 아니라. 제작 시스템, 정확히 지목하면 연출가와 번역가를 지목하고자 한다.

애니메이션의 성우가 연주자라고 한다면 애니메이션의 번역가와 연출가는 각각 작곡가와 지휘자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우’라는 곡 자체 뿐 아니라 악기의 빠르고 느려지는 완급, 높낮이, 울림과, 늘어지고 풀어짐, 어디에서 쉬고, 어디에서 다시 시작하는지 등을 최종적으로 관리하는 역할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연주자의 연주 역량(연기력)에만 돌을 던져왔지, 작곡가와 지휘자의 역량에는 의문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나는 그 둘의 역량에 의문을 던지는 것이다. 성우에는 지속적으로 신인이 공급되어 온 반면, ‘작곡자’와 ‘지휘자’는 어떤가? 공급도 수요도 적체상태 그대로이다. 신동식 씨가 나가고 와라 편의점을 제작했던 석종서PD 정도를 제외하면 거의 이동이 없는 상태.

1화부터 지적하고 싶었지만 우선 번역은 지나치게 의역이 심했다. 굳이 원문에 있는 단어를 좀 더 국어순화 하지 않아도 될 단어나 구를 지나치게 순화해 의역한 나머지 본래 문장의 맛을 떨어뜨렸다. 넘어가자면 넘어갈 수 있다, 뜻이야 통하니까. 하지만 나는 IT 블로거 이전에 영문학도로써, 프로는 아니지만 10수년 이상 번역을 해왔다. 용납할 수 없다. 대표적인 부분을 지목하자면(약간 스포일러성이 있다) .

내가 영상을 가지고 없고, 특히 투니버스 판은 영상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그냥 기억을 옮기자면. 마지막 편에서 쿠사카베 마리가 말한다. 하늘이 참 높고 푸르다고. 이런 맑은 날의 하늘을 보면 하늘에 오히려 숨이 막혀 질식할 것 같다고 말한다. 그것을 투니버스에서는 괜시리 더 우울해져 버릴 것 같다라고 단순히 해버린다. 각본가와 각본에 대한 문학적인 살인이다. 이후에 날조는 더 가관이나 이 내용의 충격이 하도 강렬하고 내 기억력이 모자란 고로 더는 못옮김을 양해해주시기 바란다. 이런 실수는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 이런 실수는 결국 나중의 연출적인 실수와 함께 어우러저 아주 멋진 실패를 일으키게 되니까.

이 장면을 계속 얘기해보자, 쿠사카베의 저 고백은 천천히  한숨을 토해내듯이 적당히 체념을 거듭하면서 몇번의 쉼표가 반복된다. 그리고 망설임이 정리가 되고 마침표가 나오고 가방을 꺼내드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은 미라이의 고민과 자신을 투영해가며 반추한 뒤 그것을 끝내고 할일을 해야지 하고 매듭을 짓는 것으로, 투니버스 판에서는 이 갈등이 깔~끔하게 회쳐져있다. 한편으로, 그에 이어서 나오는 장면은 정말 절절한 연출적인 실패와 번역의 혼란에 의해 흐름이 흐트러져버렸다. 대표적으로 기억에 남는 장면은 이것이다.
“유우키… (끌림)먹기 싫은것도 많이 있었을텐데…(끌림) 불평 하나도 않하고….(끌림) 정말 열심히 걸었지요?”(올림,울음) (원어)
“유우키는요, (올림)싫어하는 음식이 참 많거든요? (올림)그런데 뭐든지(약간 올림) 잘먹고 열심히 잘 걸어 왔어요(끌림,울음))”

괄호는 내가 말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 임의로 표시한 것이다. 얼마나 엉망진창으로 우리말로 옮겼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번역가의 의역과 연출가의 장난질로 거의 후시녹음을 자의대로 원판과는 전혀 상관없이 다시 한 셈이다. 차라리 오리지널 스크립트(다시 말해서 원판 목소리가 아니라 오디오 스크립트, 즉 대본)라도 제대로 따라 했으면 좋겠는데 그도 아닌 모양이다. 그러니까 욕을 얻어 먹어도 싸다. 하여, 성우가 독단으로 해석해서 했으면 연출이 막아서 지도를 했어야 했고, 연출이 의도 했으면 연출이 욕을 먹어야 했다. 어느쪽이든 연출이 작품의 해석을 게을리하고 대충 했다는 측면에서 욕을 먹어야 한다.

물론, 나는 마지막회 연기를 보면서 잠시 눈시울이 시큼해졌다. 분명 성우들은 매우 훌륭한 연기를 했다. 그러나 이 장면을 보면서 마음이 차가워졌다. 전혀 다른 나라 말의 문장이니 우리나라 말과 박자나 억양이 100% 일치할 수는 없지만, 저 감정선을 유지할 수는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저렇게 극단적인 대치관계를 띌 수는 없다. 나는 이 부분을 보면서 결론을 내렸다. 이 두사람이 정말 말도 안되는 실수를 했구나.

이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 것인가? 다른 창작물의 번역도 마찬가지지만 1) 업계에 정통한 사람이 2) 작품과 관련분야를 깊게 이해하고서 번역에 임해야 한다.  가령 이 경우에는 더빙과 연출에 지식이 있는 사람이 작품을 세심하게 읽고 작품의 배경지식은 최소한 알고 번역을 해야한다는 얘기다. 왜 더빙과 연출에 대해 알아야 하느냐 그래야 방송에 적합하도록 대사를 번역하고 나중에 녹음시에 이 부분을 어떻게 녹음하는지에 대한 어드바이스를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번역은 제2의 창작이라고 한다. 애니메이션은 종이에 글을 옮기는것과 다르다. 들리고 보이는 것이다. 시청자가 접하기에 최대한 원작에 가까운 감정선을 유지하도록 번역하고 그게 힘들면 ‘그렇게 느껴지는 착각이 들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레플리카를 만드는 것이다.

어느 사람은 말한다. 결국 원래 원작 또한 일본어로 된 스크립트를 읽어서 감정을 나타내는 것 뿐으로, 한국어 녹음 또한 한국어로 감정을 나타내는 것으로 100% 일본어 녹음과 일치할 필요가 있는가? 라고. 그것에 대한 내 반박은 다음과 같다. 미국군이 전함을 오리지널로 만들었으니까, 미국군 오리지널 전함의 레플리카를 한국 바다에 띄우기 위해서 우리나라 식대로 만든 배를 바탕으로 만든 미국배의 모형을 물에 뜨도록 적당히 구축해 놓고 미국 배의 레플리카라고 우기면 된다는 것인가?

5.26 추가. 혹시 이 더빙의 비평에 대하여 깨름직한 점이 있다면 후속 포스트를 읽어보기 바란다.

어머니는 두번째 아이패드를 찾으시다.

어머니는 첫번째 아이패드를 매우 감탄하시며 쓰셨다. 그러나 금새 질려서 돌려받았고. 그 아이패드는 결국 놀리기 아까워서 친구에게 돌아갔다. 그런데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 아이패드를 다시 주면 안될까라는 일이었다. 일의 발단은 이러하다. 어머니는 스마트폰을 구입하셨다. 당신은 절대로 피쳐폰을 고집하실 것이라고 주장하신 분이시다. 터치폰은 절대로 본인과 맞지 않는다고 끝까지 주장하시던 분이었는데.. 에, 결과부터 말하자면, ‘왜 이렇게 편리한 물건을 이제까지 사용하지 않고 뭐했는지 모르겠다’라는 것이다. 그 이유를 굳이 한마디로 여러분에게 알기 쉽게 표현하자면, 스티브 잡스가 2007년 키노트에서 아이폰에서 버튼을 없애면서 했던 뭐 그런 설명을(‘수많은 멋대가리 없는 버튼이 없는 대신에 필요한 버튼이 필요한 때에 나타난다’) 2012년 들어서 우리 어머니께서 납득하셨다는데 있다.

우리 어머니께서 갑자기 스마트폰을 필요로 하셨던 것은 간단히 말해서 인터넷과 VOD를 보고 싶어서였다. 우리 어머니가 계신곳은 DMB가 터지지 않는곳이라는 모양이다. 그런데 그런 장소에서 시간을 보내야 할 일이 필요했는데 궁리끝에 3G로 VOD라도 볼 수가 없을까? 라는 생각에 스마트폰을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4G(LTE)는 동영상 요금이 너무나도 걱정인 까닭에 3G 스마트폰에서 무난하게 화면이 커다란걸로 추천해 드렸다.

그런 어머니는 VOD를 보고 나름대로 3G로 검색을 하고 지도로 군대에 간 동생의 위문품을 사기 위한 장소를 검색하는 등 적응을 하고 계셨는데, 커다란 문제가 발생했다.

아이패드를 찾으시는 것이었다.

이야, 이거 곤란한데… 이미 남는 아이패드는 줬어요.. 어머니.. 어머니의 말씀에 따르면 아이패드가 화면이 커다라서 비디오 보기도 편하고 웹 서핑하기도 편하고 지도를 보기도 편하고… 이런… 어머니는 빠르게 스마트폰과 태블릿에 적응을 하고 계셨다. 점점 할 수 있는게 늘어나고 계셨다. 점점 물어보는게 늘어나고 있었다. 아아… 스마트 시대는 점점 넓어져가고 있었다.

내가 걱정을 하는 것은 안드로이드 단말의 앱의 통일성이 정말 제각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자, 어떤 앱은 그냥 단말기를 기울이면 화면이 전체화면이 되고 어떤 앱은 버튼을 눌러야 확대가 되고… 등등등. 덕분에 어머니는 일일히 나한테 그것을 물어보아야 했다. iOS라면 거의 대부분 화면을 기울이는걸로 해결될 문제였다.

내가 안드로이드 휴대전화를 선택했던 이유는 전화나 메시지 기능이 기존에 사용하던 피쳐폰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일단 그 기능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기능이기 때문에 그게 닮은 쪽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기종은 갤럭시S2로 했는데 그 이유는 내가 그 기종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사소한 에러메시지라도 똑같지 않으면 어른들은 당황해하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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