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 이어폰?
작년 어느 날의 일입니다. 트위터의 실시간 트렌드에 ‘줄이어폰’이라는 것이 올라왔었습니다.
세월이 변했다는걸 체감… '이어폰'이라는건 원래 3.5mm 미니 플러그를 꽂아서 듣는 물건이었고 '무선 이어폰'이 새로 나온건데 이제는 무선 이어폰이 당연하고 줄 달린 이어폰을 '줄 이어폰'이라고 하는군… pic.twitter.com/C2r92b2711
— 푸른곰 (@purengom) May 5, 2022
용기(courage)
‘요즘 분’들은 어떠실지 모르겠지만, 사실 제가 살면서 거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 이어폰이라는 것은 줄이 달려 있었고 그 끝에 3.5mm 미니 플러그가 달려있는게 당연한 것이었죠. 그것이 뒤집힌 사건이 바로 2016년 9월 9일의 일입니다. 아래 동영상을 눌러보시면 이어폰잭을 폐지하면서 에어팟을 소개하는 시점부터 보실 수 있습니다.
아이폰 7에서 필 실러는 태연작약하게 라이트닝 포트가 애당초 디지털 오디오를 위해 설계되었음을 주장하며 라이트닝 포트를 사용하는 오디오 기기가 이미 엄청나게 많다고 말하며, 유선 커넥터가 처음 사용된 것이 100여년 전 스위칭 보드의 연결을 위해서 고안된 것이라며 이를 벗어나기 위한 ‘용기(courage)’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무선을 들었고 그 답이 아시다시피 에어팟(AirPods)이였죠. 에어팟은 아이폰7과 동시에 나오지는 못했습니다만 말입니다(12월 출시).
스테레오 미니 플러그의 역사를 찾아서
필 실러가 대충 얼버무린 ‘줄 이어폰’의 역사가 궁금했습니다. 사실 필 실러가 사진에서 언급한 것은 이른바 표준 플러그였고, 우리가 이날까지 사용했던 것은 이른바 스테레오 미니 플러그라고 불리는 물건이었거든요. 스테레오 미니 플러그의 역사는 훨씬 짧았습니다.
스테레오 미니 플러그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스테레오 미니플러그가 제일 먼저 쓰였던 물건의 역사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마치, 에어팟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 아이폰7에 다다르는 것과 비슷한 이치죠. 스테레오 미니 플러그가 제일 먼저 사용된 기기는 소니가 개발한 ‘워크맨’입니다.
워크맨의 시작
1978년 이부카 마사루 소니 당시 명예회장이 해외 출장시에 음악을 듣기 위해서 소니제 ‘TC-D5’라는 녹음기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당시에 스테레오 재생을 할 수 있는 테이프 레코더는 보급되어 있었으나 이부카가 사용했던 레코더만 하더라도 교과서 사이즈에 이를 정도로 소형, 경량인 제품은 없었고, 사이즈가 작은 녀석은 모노럴 재생 만 가능했다고 합니다. 그 즈음 소니에서 ‘TCM-100 프레스맨’이라는 손바닥 만한 소형 모노럴 테이프 레코더를 개발, 발매하게 되자 이부카는 당시 부사장이었던 오가 노리오에게 지시해 재생 전용이어도 좋으니 이 프레스맨을 기반으로 스테레오 회로를 넣어 스테레오로 들을 수 있는 기기의 시작(試作)을 의뢰 합니다.
오가는 테이프 레코더 사업부장이었던 오소네 코조에게 연락해 이부카의 의향을 전달하고 의뢰를 수락하게 됩니다. 그리고 1978년 10월, 오소네의 작업장에 방문해서 개조된 프레스맨의 소리를 들어보고 매우 만족한 이부카는 해외 출장에 이를 들고 다니게 되었고 회장인 모리타 아키오에게도 이를 권했다고 합니다. 모리타 역시 이 개조 프레스맨이 매우 마음에 들었고 사업화를 검토하게 이릅니다.
모리타는 본사에서 관계자를 소집해서 이렇게 발언했다고 합니다.
이 제품은 하루 종일 음악을 즐기고 싶어하는 젊은이들의 욕구를 채워주는 제품이다. 음악을 바깥에 들고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녹음 기능은 필요없다. 헤드폰이 딸린 재생 전용기로서 상품화 하면 반드시 팔릴 것이다. 젊은이, 즉, 학생을 타겟으로 하는 이상 여름방학 전에 발매해 가격은 프레스맨과 같은 수준인 4만엔을 밑도는 수준으로 만들어보자. この製品は、１日中音楽を楽しんでいたい若者の願いを満たすものだ。音楽を外へ持って出られるんだよ。録音機能はいらない。ヘッドホン付き再生専用機として商品化すれば売れるはずだ。（…）若者、つまり学生がターゲットである以上、夏休み前の発売で、価格はプレスマンと 同じくらい、４万円を切るつもりでいこうじゃないか。
모리타 아키오
오소네가 본격적으로 개발을 진행하는 가운데, 이 제품에서 제일 염두에 둔 것은 신뢰성이었고,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이미 50만대 이상 판매된 프레스맨의 기계부분을 거의 유용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워크맨에 부속할 헤드폰도 기술연구소에서 당시 초경량 소형 헤드폰인 ‘H･AIR(‘헤어’로 읽음)’가 거의 완성되어 이를 부속하기로 결정하게 됩니다.
물론 당시에 판매 대리점이나 언론등지에서 테이프 레코더는 녹음이 되어야 하는것이 당연시 되던 시절이라 반응이 그다지 시큰둥했다고 전해집니다. 발매일이 7월 1일로 결정되었고 그에 맞춰 언론에 소개하는 발표회가 6월 22일로 정해집니다.
6월 22일 긴자 소니 빌딩에 모여든 기자들에게 버스로 요요기공원으로 이동하면서 워크맨과 헤드폰이 전달되었고, 공원에 도착한 기자들이 헤드폰을 쓰자 음악과 함께 워크맨 TPS-L2의 상품 설명이 흘러나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공원을 자유분방하게 돌아다니는 스태프와 아르바이트들의 데모가 시작되자 기자들은 꽤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막상 발매일인 7월 1일이 되고 나서 1개월간 판매량은 3000대에 그쳤고 마케팅팀과 오소네의 부하들은 포기하지 않고 사람들의 눈에 띄는 곳에서 워크맨을 사용하는 것을 일부러 보여주거나 영향력 있는 유명인들에게 제품을 사용하도록 하는 등 입소문으로 마케팅을 했고 그 결과, 초도 생산분 3만대가 8월달에 다 팔리고 생산이 따라가지 못하는 사태가 6개월간 지속되게 됩니다.
이 ‘워크맨’의 개발에 있어서 시간이 촉박했던 관계로 오소네를 비롯한 소니 엔지니어들은 거의 대부분을 프레스맨을 유용하는 설계를 취할 수밖에 없었으나, 스테레오 미니 플러그 잭(3.5mm 이어폰 잭) 만큼은 새로 개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필 실러가 말한 표준 플러그는 직경 6.3mm라는 굵은 지름의 물건이었는데, 이 표준 플러그는 스테레오 플러그가 존재하였으나 이어폰용으로 개발된 직경 3.5mm의 미니플러그는 워크맨의 발매 때까지 스테레오 플러그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죠. 그때까지 이어폰이라는 물건은 한쪽 귀로만 듣는 물건이었기 때문이었기 때문인데, 여하튼 들고 다니면서 사용할 수 있는 사이즈인 워크맨에 스테레오로 음악을 들을 수 있게 하면서도 기기 사이즈 문제로 인해 표준 플러그를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러한 이유로 스테레오 미니 플러그가 개발되기에 이릅니다.
이 개발 자체는 어렵지 않았으나, 표준의 보급에 어려움이 있었다고 합니다. 소니는 초대 워크맨인 TPS-L2 발매를 즈음해서 사용자 편익을 우선해 업계 전체의 표준으로 삼을 수 있도록 EIAJ(일본 전자 기계 공업회, JEITA의 전신)에 노력해 이 ‘스테레오 미니잭’을 표준 규격화하는데 성공합니다. 이로 인해 이 시장에 타사의 참가가 촉진되어 시장이 급확장 되어 디팩토 스탠다드가 되어 많은 포터블 음악 플레이어와 휴대폰에 추가되었습니다. (원문)
어느덧 햇수로 7년…
필 실러의 ‘용기’가 조롱과 비난을 받은 것이 7년전인데 이제는 1만원대의 무선 이어폰까지 나오고 있는게 현상입니다. 오픈 마켓은 물론 다이소에만 가도 구할 수 있게 되었죠. 싸게는 1만원대에서 비싸게는 100만원이 넘는 헤드폰이 나오는 시장이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배터리 교체가 거의 불가능한 탓에 수명이 짧은 수많은 전자 쓰레기를 양산하게 된 게 탐탁지 않긴 하지만요.
완전 무선 이어폰은 배터리탓에 2-4년 안에 문자 그대로 쓰레기가 될 물건이라는 지적. 수리가 불가능한 에어팟과 달리 어느정도 개선만 하면 수리가 가능해보인다는 갤럭시 버드+나 자브라 75t의 예를 들며 업계의 개선을 촉구. 전문가의 배터리 수명 연장 팁도 소개. https://t.co/rfKJfAThYn
— 푸른곰 (@purengom) February 26, 2020
얼마전 WWDC ’23에서 비전 프로를 내놓으면서 9년만의 신제품 출시라고 하지만 오늘날 애플의 실적을 보면 결코 에어팟을 무시할 수 없고, 에어팟이 아니라 하더라도 줄을 자른 ‘용기’가 훗날 시장과 사람들의 생활, 그리고 문화에 가져온 영향은 결코 작은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