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나의 해피해킹 키보드

첫 만남

해피해킹 키보드는 확실히 특이한 배열의 키보드입니다. 요즘이야 그리 잦지 않습니다만, 가끔 인터넷 기사 분께서 오셔서 컴퓨터를 만져야 할 때, 제 컴퓨터가 Windows 기기가 아닌것 다음으로 당혹스럽게 만드는 존재이곤 했죠. 역시 마찬가지 이유로 어지간하면 남이 제 컴퓨터를 함부로 만지지 못하게 되는 계기가 되곤 했습니다. Caps Lock이 없고, 그 자리에 Ctrl이 있는 특이한 배열에 틸드의 위치가 다르고 화살표 키는 아마 사용법을 알기 전에는 죽어도 못 찾을겁니다. (웃음) 이 특이한 키보드의 검정 몸체에 검정 자판 인쇄는 정말로 멋있죠. (인쇄가 보이지 않다보니 남이 만지기 더 어렵습니다) 게다가 이 키보드를 가지고 글자를 치는 것은 마치 떡을 주무르는 듯한 독특한 느낌마져 받게 됩니다. 멤브레인 키보드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고, 기계식 키보드와도 조금 결이 다르다는걸 알 수 있죠. 이 키보드는 크기도 작아서 책상에서 자리도 많이 차지 않기 때문에 2006년 우연히 처음 만나자 마자 작가인 지인에게 권했을 정도였습니다.

두드리면 즐거운 나의 키보드

해피해킹 키보드로 트윗을 하나만 치더라도 마치 전문가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합니다. 이따금 코드를 쳐야 하거나 쉘에 명령어를입력해야 할 때의 기분은 그야말로 속도제한 없는 도로에서 슈퍼카를 모는 것 같은 기분이죠. 명령어를 치거나 글을 쓰면서 느껴지는 고양감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밤 늦은 시간에 음악을 들으며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보내는 기분이란!

첫만남으로부터 16년간…

결과적으로 제 첫번째 해피해킹 키보드인 Happy Hacking Keyboard Professional 2는 16년간 현역으로 있었습니다. 늘 사용한 것은 아니었지만 17년이 지난 지금도 고장나지 않은 채로 온전한 상태로 있습니다. 문제는 유선이었다는 점이죠. 2010년대 초중반이 지나면서 무선 키보드와 마우스의 편리함에 눈을 떴기 때문이랄까요. 게다가 침대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난 까닭도 있습니다. 침대에 노트북을 들고 가서는 거기에 마우스와 유선 키보드를 펼치는건 굉장히 번거로운 일이었죠. 노트북을 쓰는 시간이 늘어남에 따라서, 그러다보니 노트북의 키보드에 그냥 만족해 버린 탓이 컸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역시 가끔 책상 위에서 해피해킹 키보드를 사용하면 트윗 하나를 하더라도 즐겁기 이를데가 없어서 신이 나곤 했죠.

16년만에 새로 들인 해피 해킹 키보드

작년, 16년만에 새로이 HHKB Professional Hybrid Type-S 를 구입했습니다. 색깔과 키 각인은 모두 검정에 각인, US ANSI 배열이죠. ’19년에 해피 해킹 키보드의 완전 리뉴얼된 버전들 중 하나입니다. 블루투스를 통한 무선 사용이 가능하다는 점이 정말 참을 수 없이 기뻤고, 이제는 케이블 구하기도 힘든 Mini USB가 아니라 USB Type-C로 연결할 수 있다는 점이 반가웠습니다. 무선 사용시에 전원으로 건전지를 사용하지만 전에 사용하던 키보드가 16년을 사용했던 점을 생각해보면 오히려 리튬 배터리가 키보드의 수명보다도 먼저 ‘가버릴 것 같아’ 이게 옳은 선택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19년에 출시된 라인업 중에서 고속 타이핑에 적합하도록 조금 짧아진 키스트로크와 키 타건 소음을 줄인 플래그십 모델인 Type-S, 이거 하나밖에 없겠다 싶었습니다. 구입하고 나자마자 가격이 오른 것은 행운이었을까요. 그러나 구입 한달이 안되서 책상 위에서 현기증을 일으킬때 키보드를 떨어뜨려서 모서리가 패이는 참사가 벌어지고 맙니다. 작동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고 살짝 패인 정도지만요. (지금 이 포스트도 그 키보드로 치고 있지만 동작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습니다)

푸른곰이 해피해킹 키보드를 쟁여두다. 그 이유는?

’22년 중반에 후지쯔가 HHKB의 제조사인 PFU를 복사기로 유명한 리코(Ricoh)에 대부분 지분을 매각하기로 결정합니다. 누가보더라도 PFU의 주 사업인 ScanSnap으로 대표되는 스캐너 사업을 노리고 인수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새 주인 밑에서 ‘취미 사업’인 키보드 사업이 오래 지속될 것인가 의문시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업계 관계자 말이나 회사의 공식 발표나 당분간 변함없이 사업을 이어나간다고 하지만 말이지요. 그 와중에 아까 말한대로 어렵사리 손에 넣은 새 키보드가 모퉁이가 패이는 ‘사건’이 벌어지고, 이 참에 키보드를 좀 쟁여둬야겠다 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참사의 시작이었죠.

우리나라에 해외 전자기기를 직구로 수입해보신 분이라면 ‘전파인증’이나 ‘형식승인’ 등을 잘 아실겁니다. 그리고 그걸 1인 1일 1대에 한해 면제해준다는 것도요. 그 ‘특례’를 벗어나서 수입하기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나마 만약 이 키보드가 우리나라에 전파인증을 받은 제품이었다면 관세사를 통해 비용을 치르고 들여올 수 있었겠으나, 이 제품은 아무도 우리나라에 정식으로 전파인증을 받고 들여오지 않았고 그걸 제가 한다고 하더라도 비용이나 시간 모두 어처구니없이 들어간다는 대답을 듣게 되었습니다. 결국 두 대 중 한 대는 일본으로 돌려보내는 신세가 되었고, 일본에서 수출한 일본산 키보드를 일본에 재반입하면서 다시 세금을 내고 운송료를 내는 웃픈 상황을 겪게 됩니다. 한마디로 돈은 돈대로 시간은 시간대로 들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 수입하는 관부가세는 물론이요, 일본으로 돌려보낸 다음 관세와 소비세, 그 와중에 운송료도 모두 한 푼 한 잎 빠짐 없이 내야 했습니다. DHL 관계좌와 관세사, 관세청, 그리고 심지어 일본 세관에도 전화 통화를 해야 했었었죠.

어찌됐든 한대를 먼저 받고, 일본을 거친 키보드는 지인을 경유하느냐 아니면 배대지에서 재배달 해주느냐, 반품을 하느냐 등을 고려한 끝에 결국 한국으로 재발송 해서 (운송료와 관부가세를 다 내고) 두대 모두 받는데 성공합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는 리코는 현재까지는 PFU에 본격적인 칼질을 글을 쓰는 2023년 1월에서야 대기 시작했고, 그 직전에는 PFU에서 HHKB 라인업의 신제품(‘눈 색상’)이 나오는 등… 커다란 변화는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저는 뭘 한걸까요?’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입니다. 물론 한번 사면 십수년은 쓰는 기계를 석대나 쟁여 두고 있으니 든든하기도 하거니와 후회는 없습니다만서도, 한동안 세관 통관에 트라우마가 가시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맺으며

그래서 저는 이 키보드로 여전히 글을 쓰고 트윗을 하고, 블로그가 돌아가는 서버를 유지관리하며, 사람들과 잡담을 떨고 대단한 일부터 시시껄렁한 일까지 하고 있습니다. 불이 들어오지도 않고, 배터리가 오래가는 것도 아니고, 작은 키보드도 아니고, 키배열 마저 최고로 편한 키보드는 아니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키보드는 제 책상에 오랫동안 있어왔고 그리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자리잡고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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