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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미야 하루히에 이끌려 등교 거부였던 중 2 소녀, 얼굴을 들다

35인이 방화로 희생된 교토 애니메이션 제1 스튜디오 근처의 헌화대에는 연일 팬들이 찾아오고 있다. 맹열한 더위 속에서 가만히 오랫동안 손을 합장하는 사람들은 “나는 쿄애니에 구원 받았다”라고들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그 이유를 들어보았다.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에

“하루히와 쿄애니가 있었기에 제가 있어요”

교토부 난탄시의 중학 2학년의 여학생(14)는 27일 어머니를 곁에 데리고 사건 현장 근처의 헌화대를 찾았다. 흐트러 쓰러질 것 같으면서도 종이학을 바쳤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중학교에 들어가 본래의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동급생한테 미움받기 싫어’서 신경을 곤두세웠다. 주위에 녹아들지 않은채 학교에 가는 것이 점점 힘들어졌고 작년 9월 부터 등교 거부를 하게 되었다.

집에 있던 시간과 마음의 틈새를 매워주었던 것은 유료 동영상 사이트에서 별 생각 없이 본 쿄애니 제작의 애니메이션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였다.

제1화, 주인공 하루히가 고교 입학식 후 자기 소개에서 퍼부은 대사가 가슴을 찔렀다. “보통 사람에게는 흥미없습니다. 이 중에서 우주인, 미래인, 이세계인, 초능력자가 있다면 나한테로 오십시오. 이상”

눈이 번쩍 뜨였다. “나는 저런 식으로 자신이 원하는 동료나 친구를 구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사람들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마는 자신과는 정 반대의 모습이었다.

괴인에 말도 안되는 언동을 반복하는 하루히.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마구 달리고, 반에서 고립되면서도 동료들 사이에서는 사랑받고 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면 자연스럽게 자신도 미소를 짓게 되었다. 싫은 사람에게는 필사로 신경 써줄 필요 없어. 나도 좀 더 자신을 드러내도 되는구나. 라고 생각했다.

2학년에 올라온 올해 4월 오랫만에 학교는 긴장했지만 자신을 가지고 등교할 수 있었다. 사이좋아지고 싶은 여자애에게 자신이 말을 걸었다. 지금은 애니메이션에 대해 이야기로 달아오르는 가장 큰 친구이다. 괴로울때에는 하루히가 동급생을 부를 때의 ‘어느 누구에게도 위축되지 않는 위세 좋은 목소리’를 생각해낸다. 이제 학교에 가는 것이 무섭지 않다.

그림을 잘 그리게 된다면, 용기를 준 쿄애니에서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싶다. 그런 꿈이 생긴 직후 이런 사건이 벌어졌다. “쿄애니가 제일 도움이 필요로 하는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괴롭고 한심하다” 그리고 얼굴을 올려서 말했다. “조금이라도 힘이 되고 싶으니까, 굿즈를 사고 모금활동에 참가합니다”. 울음기 있는 목소리에 힘이 실려있었다.

”러키☆스타”에

“제일 힘들었던 순간에 힘을 받았다. 인생을 밝게 변하게 해주었다. 정말 고맙습니다”

이바라키 현 도네정의 학원 강사 혼죠 나오키 씨(34)는 감사의 뜻을 담아 헌화대에 꽃을 바쳤다.

사법 시험 합격을 목표로 했던 대학 법학부 4년 때, 우울증이 생겼다. “일어나 있는 시간은 모조리 공부 삼매던 매일, 심신이 초췌해졌다”. 외출도 거의 안하고 1년간 쉬었다.

그런 때 아무 생각 없이 보았던 것이 쿄애니의 애니메이션 “러키☆스타”였다. 여고생들의 일상을 코미컬하게 그린 작품이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진심으로 즐기는 것이 가능해서 오랜만에 소리내며 웃었다. 복잡한 스토리가 있는 것은 아닌데도 정신차려보니 빨려 들어 있었다”. 아무것도 재미를 느끼지 못하던 자신의 속에서 무언가가 터져나와 떨쳐 낼 수 있었다. 다음날 애니의 무대를 보기 위해 모델이 된 사이타마현 쿠키시 사기노미야에 향하는 전철을 탔다.

사법시험 합격은 하지 못했으나, 대학을 졸업하고 학원 강사 직업에 보람을 느낀다고 말한다. “”러키☆스타”가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은 없을 겁니다”

”Free!”에

도쿄도에서 찾아온 여성(21)은 헌화대 앞에서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움츠렸다. “나의 목소리를 구해주신 분들인데 왜 희생되어야만 하는 걸까”

고등학교 입학후, 주위에 녹아들지 못하고 친구를 만들지 못했다.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 고1의 여름방학 전, 수영에 청춘을 건 소년 들을 그린 쿄애니 작품 “Free!”를 텔레비전에서 보았다.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서 분투하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과 겹쳐져 푹 빠지게 되었다.

좋아하는 캐릭터는 벽에 부딛혀가면서도 앞을 바라본다. “살아만 있다면 다음이 있어” 여성은 죽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드럭스토어에서 아르바이트로 매일을 보내며 점심값도 아꼈다. 모든 것은 애니메이션의 굿즈를 사기 위해 “쿄애니를 위해 돈을 쓰고 있는 이상 살아 있는 의미는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다.

학교에서는 친구를 사귀지 못했지만 쿄애니 작품의 이벤트에 가면 옆에 앉은 사람과 이야기 하거나 굿즈를 교환하거나 하면서 동료가 생겼다. “쿄애니가 없었다면 친구도 없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를 낳은 작화 감독이나 아름다운 작품을 완성해낸 많은 수의 직원들의 안부를 알 수가 없다. 매일 밤 불안에 떨고 있지만 쿄애니로 이어진 동료들과 서로 위로하고 있다고 한다.

(아사히신문 전자판 7/29 원문)

쿄애니 “먹고 살수 있는 인재를” 업계 상식을 뒤집는 고용과 임금

35명이 희생된 교토 애니메이션 제1 스튜디오의 방화 살인 사건은 국내외의 팬에게 슬픔을 줌과 동시에 추도의 목소리와 지원의 움직임이 매일같이 늘고 있다. 거기에는 작품의 팬임과 동시에 ‘만든 이’에 대한 강한 마음이 있다. 쿄애니는 어떤 스튜디오였나?

질이 높고 정성들인 작품 만들기를 지지해온 것은 쿄애니의 인재 육성 및 노동 환경이었다. 히카와 류우스케 메이지 대학 대학원 특임교수(애니메/특촬 연구)는 “도쿄 1극 집중으로 외주/프리랜스에 의해 돌아가는 것이 많은 애니메이션 제작에 있어 교토에 거점을 두고 정상적인 고용으로 영상 퀄리티의 향상과 안정화를 행했다.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가 브랜드화 되는 계기가 되었고, 지방 스튜디오(도야마현의 P.A. WORKS 등)가 여러개 설립되는 마중물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1981년 창업, 도쿄의 제작회사에서 일했던 경험이 있던 핫타 히데아키 사장의 부인 요코 씨가 근처의 주부들을 모아 셀 원화에 색칠하는 “컬러(仕上げ)” 공정을 하청받으며 시작, 이후에는 작화와 연출, 디지털 처리까지도 손 대게 되었다.

작품 만들기를 위해 취재에 협력해 스탭과도 친교가 있는 교토문화박물관 학예과의 모리와키 기요다카(森脇清隆) 영상 정보실장에 다르면 핫타 부부는 스태프를 “부모로부터 자식들을 맡고 있는 마음”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완전 성과제로 신인이라면 월 수입 수만엔이라는 저임금/장시간근로가 문제시되어 온지 오래된 업계에 있어서 핫타부부는 애니로 먹고 살 수 있는 인재를 사내에서 키우는 것을 목표로 정사원으로 채용해 안정적인 수입을 보증했다.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 하청에서 벗어나 오리지널 작품에 힘을 들이게 되었다. 11년에는 “KA에스마문고”라는 출판사업을 일으켰다. 원작의 권리를 가진 출판사가 버는 것이 아니라 원작도 자사에서 충당해서 “현장에서 땀을 흘린 사람들이 보답 받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생각에서부터 였다. 방화 사건은 쿄애니 자사 발 히트작이 계속해서 태어나서 만범순풍의 시기에 일어났다.

모리와키씨는 방화의 현장이 된 제 1스튜디오를 방문해본 적이 있다. “육아중의 스태프를 위해서 장난감들이 놓인 어린이들이 놀 수 있는 스페이스가 있었습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재능을 길러내기 위해 일하기 쉬운 환경을 정비했다. 그 결과 여성도 다수 남아, 여성 스태프가 많은 것은 쿄애니의 특징 중 하나다.

09년 히트작 ‘케이온!’은 감독, 캐릭터 디자인, 각본 등 메인 스태프가 전부 여성. 주인공 여고생들은 이상할 정도로 가느다란 다리나 커다란 가슴이라고 하는 애니에 있을범직한 남성 시선의 체형이 아니라 건강적인 몸이나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사춘기의 아름다움이나 귀여움을 표현했다. 속편이나 영화판도 만들어질 정도의 히트에는 여성팬의 공헌도 컸다.

“모두가 한데 모여 만든다” 는 핫타 사장이 잘 사용하던 말이다. 배경을 만들기 위한 취재 로케에 동행했던 적이 있던 모리와키씨는 “감독이나 미술담당 등 전문을 넘어서 의견이 활발하게 교환되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말한다.

TV 애니메이션 “빙과”(12년)의 원작자이자 작가인 요네자와 호노부는 사건을 맞고 쓴 블로그에 로케이션 헌팅에 동행했던 추억을 적었다. “여기가 소설의 이미지에 맞는 장소입니다 라고 말했던 때, 제작진의 분들의 눈의 색이 바뀌어 저는 어정쩡하게 접근하지 못할 진지함을 가지고 자료를 모아주셨습니다.”

TV 애니메이션 “타마코 마켓”(13년)의 무대였던 데마치 야나기 상점가(교토시 카미교구)의 꽃집 “꽃의 봄바람”. 카메이 미치마사 亀井道正 점장은 “10명 이상의 스태프들이 와서 꽃의 반입이나 청소의 방법까지 세세히 취재해 가셨죠”라고 말한다. 이야기는 생화에 함께 멀리서 온 신비스러운 새가 꽃의 사이에서 튀어나와 주인공 타마코와 만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 이야기에서 이런 아이디어가 나온다니”. 놀랐던 것은 그 후 국내외부터 팬이 상점가를 방문해왔다는 것이다.

“사건을 믿을 수 없다.” 라고 카메이상은 말한다. 지금은 연일 팬이 헌화대에 바칠 꽃을 사기 위해 온다. “피해자에는 여성이나 젊은이들이 많이 있다고 들었는데 헌화대의 꽃에는 귀여운 꽃이나 예쁜 색을 한 꽃을 둘까요?” 라고 손님에게 권하면서 꽃다발을 만들고 있다.

스태프에 존경의 뜻

쿄애니 작품은 팬에게 있어 스태프의 ‘얼굴’이 보이는 애니였다. 대형 스튜디오와는 달리 소수정예의 가족경영같은 스타일, 예를 들어 “케이온!”과 “타마코 마켓”의 주요 스태프는 거의 같아, 팬은 스태프의 이름을 기억하기 쉽다.

“팬은 작품의 엔드 크레딧에 나오는 이름을 한명씩 기억해 “만드는 이”를 존경해 작품의 팬으써만이 아니라 애니메이터의 팬이 되어갑니다.” 라고 말하는 메이지대에서 애니메이션 문화론을 가르치는 레나트 리베라 루스카 강사(애니메이션 프로듀서). “해외의 열심인 팬들은 애니메이터의 정보를 일본어로 모아 공유합니다”. 국내외에서 추도의 목소리가 매일같이 느는 것도 “작품을 넘어서 스태프에 대한 친근감이나 존경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 라는 것.

쿄애니의 지명도는 국내외에 널리 알린 작품이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06년)이다. 엔딩곡에 맞춰 캐릭터가 절도있게 움직이며 춤추는 ‘하루히 댄스’가 유행, 당시 개설된지 얼마 안된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에서는 ‘춤추어 보았다’ 라는 제목을 단 동화가 전세계에서 업로드 되었다. “쿄애니는 캐릭터의 심정을 나타낼때 말 뿐만이 아니라 배경이나 구도에도 섬세하게 표현한다. 그것은 언어나 문화를 넘어 전세계 사람들의 마음을 흔드는 힘이 있었다”고 리베라 강사는 말한다.

(아사히 신문 전자판 7월 30일 원문)

Pray for Kyoani

저의 오타쿠 인생을 반추해보면, 오타쿠는 ‘되는게’ 아니라 ‘되어 있는 거’라는 이야기만큼 잘 들어맞는 설명이 없습니다. 적극적으로 덕질을 할 생각은 없었지만 어느새인가 저는 골수까지 훌륭한 오타쿠가 되어 있었죠.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제가 교토 애니메이션, 약칭 ‘쿄애니’ 작품을 언제 처음 접했는지, 그리고 그때마다 어떤 감상을 가졌는지는 사실 불분명합니다. 어느정도 망각의 저편에 있는 셈이죠. 하지만 분명한건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과 ‘케이온’이 하나의 이정표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죠. 벌써 10년이 되었습니다만, ‘엔들리스 에이트’ 사태 때 어리둥절하며 매주 똑같은 이야기를 보던 기억이 있을 정도니까요.

그 이후로도 ‘빙과’를 기점으로 쿄애니 작품은 거의 빠짐없이 봤고 상당수의 미디어를 구입할 정도로 빠졌죠. 그리고 굿즈도 이것저것 샀습니다. 특히 복제 원화는 정말 어렵사리 구했었네요. 물론 쿄애니에서 낸 복제 원화는 보기 좋게 컴퓨터로 수정을 해서 내놓은 것이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매우 아름다웠습니다. 사람 손으로 이렇게 그릴 수 있구나 감탄하곤 했습니다. 기회가 되면 모았고, 감탄했습니다.

주지하시다시피 쿄애니 제1 스튜디오에 대한 방화 테러가 일어난지 사흘이 지났습니다. 사흘이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던 분들과 화면을 아름답게 장식해주시던 분들이 서른 네분이나 돌아가시고 제가 감탄하던 원화들의 오리지널은 이제 남아있지 않는 물건이 되었을 공산이 높습니다.

2001년 미국 동시다발 테러사건(‘9/11 테러’)이나 2011년 동일본 대지진, 2014년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같은 대형 참사와 마찬가지로 이번 사건으로 인한 피해는 막대하고 후유증 또한 오래 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재건을 다짐한 핫타 히데아키(八田英明) 사장 말마따나 언젠가는 반드시 쿄애니는 부활 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지만 그렇더라 하더라도 앞서 언급한 세 사건이 그러했듯이 그 전과 그 후의 모두의 마음은 결코 같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범인에 대한 야속함도, 700제곱미터(210평 가량) 건물의 불이 완진되는데 걸린 20시간이라는 긴 시간도, 아직까지 안부확인조차 완전히 되지 않은 상황(정확히는 확인 및 공개까지 시간이 걸리는 상황)이라는 답답함도 있습니다. 가족들 조차 확인이 안되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는데 어떤 사람이 어떻게 됐다더라 같은 카더라만 횡행하고 있으니 환장할 노릇이군요.

뭐가 어찌됐든 저는 범인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용서안한들 뭐가 달라지겠냐만서도.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 바로 옆에 그의 자리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번 사태에 대해 저는 트위터를 통해서 여러 기사를 소개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같이 가슴 아파하셨고 서로가 서로를 위로했지요.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은게 고인을 모욕하고, 가슴 아파하는 사람들을 힐난하거나 조롱하는 사람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모로 사람의 바닥이 어디 까지 떨어 질 수 있는가 실감할 따름입니다.

“‘기대’라는 것은 절망적인 차이에서 비롯된다”는 고전부 시리즈의 대사가 떠오릅니다. 현실이 절망적인 만큼 시궁창이니 쿄애니의 부활을 ‘기대’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지지 말기를! I Pray for Kyoan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