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클린 플래너에 꼭 들어있는 것이 Weekly Compass라는 책갈피이다. 이 책갈피에 Weekly Compass 카드를 꽂아 사용한다. Weekly Compass 카드는 한팩에 52장이 들어 있는데, 여기서 볼 수 있듯이 한주에 한장씩 떼어내서 사용한다. 위클리 컴파스를 왜 사용하는 것일까? 위클리 컴퍼스는 이름 그대로 자신의 사명과 목표, 그리고 일일 생활간의 간극을 줄여주는 역할을 해주고 자신의 사명과 목표의 방향으로 가르쳐 주는 것이 바로 위클리 컴퍼스 사용의 이유이다.
매일매일 우리는 ‘해야할 일’의 연속이다. 프랭클린 플래너가 주창하는 것은 스티븐 코비 박사의 이론, 소중한것을 먼저하라는 것을 실천하도록 돕는 것이다. 만약 위클리 컴파스가 없다면 우리는 매일매일 해야하는 허드렛일(chore)들에 정작 중요한 일들은 아예 생각도 못하게 될 것이다. ‘좋은 가족’이 되자라는 목표를 세워두었다면, 그것을 실행하려는 엄두도 하기전에 내 우선 업무는 이를테면 김부장 메일, 거래처에 팩스 같은 것들로 그득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일일히 목표란을 살펴봐가면서 할수는 없는 노릇이다. 위의 예처럼 좋은 가족이 되자는 목표를 정했다고 해서 그것을 덩그러니 좋은 가족이 되자라고 우선 업무에 적을 수는 없는 것이다. 도대체 뭘 하라는 건지 알수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위클리 컴파스는 한주에 한장을 꺼내 쓰는데, 그 시점은 주말이 될 수도 있고, 주초가 될수도 있을텐데, 어찌됐던 중요한것은 그 시점에 자신이 생각하기에 무엇을 해야하는지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선 포스트에서 프랭클린 플래너의 미학은 자르기라고 했는데, 그 시점에 자르기를 해야하는 것이다. 좋은 가족이 되자를 잘라보는 것이다. 마치 초등학교 때 교장선생님이 하는 훈화 말씀에서 정해주는 주간 목표마냥, 그 주에 맞도록 잘라보는 것이다. 으음… 이번주에는 어떻게 하는게 좋을까? 좋은 아버지가 되기로 정했다고 쳐보자, 이주 금요일에 아들 생일이 있다. 그것을 위클리 컴파스에 넣어보자.
그리고 매일 아침 위클리 컴파스를 살펴보자, 메일을 보내고 하수구를 뚫는 따위의 일을 적는 것보다 최우선적으로 말이다. 아직 월요일이고 시간이 있다. 오늘은 “파티를 할 장소 고르기”와 “선물 고르기”를 적자. 그리고 나서 이제 해야하는 일을 적어보자. 이렇게 우리가 목표로 하는 일을 최우선적으로 ‘도출’ 해낼 수 있다. 이런식으로 나머지를 해나가면 된다.
좀 어이 없겠지만 첫눈이 URL 등록을 멎은 지금으로, 이러한 기분이 든다. 내 홈페이지가 과연 검색엔진의 척도가 될수 있을런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구글을 비롯해서 MSN이나 야후!(미국)에서도 푸른곰을 치면 내 홈페이지가 상위에 나오는 판국에… 첫눈은 발끝도 못쫓아온다.
불과 나는 수개월전 까지만 해도 EOS-20D를 가지고 있었다. 사진기 깨나 만져봤다는 사람들도 당시 스무살도 안되었던 내가 EOS-20D의 사진 카운터를 1만 7천장을 끊었다는 사실에 ‘어이쿠’ 한소리 안하는 사람이 없었다. 만약 사진을 모두 뽑아서 쌓으면 사진 한장에 0.01mm 두께라는 가정하에 1.7m라는 높이가 쌓인다.
나는 미쳤다는 소리를 불구하고 사진이 필요하다면 공연장 바닥에 엎드려 포복전후진을 했고, 무릎이 깨지건 말건 간에 무릎을 꿇고 사진을 찍어댔고, 땀이 비오듯 내리는 여름에도, 얼어붙은 금속제 보디에 동상걸릴것 같던 겨울에도 항상 이 녀석을 ‘휴대’하면서 사진을 찍어댔다. 만 칠천컷, 그것은 이렇게 실현한 수치였다.
나는 이렇게 찍은 사진을 항상 그날 잠자리에 들기 전에 간략히 후보정해서 당시 운영하던 ‘미니홈피’의 사진첩에 올렸는데, 하루는 한시간 동안 찍은 사진이 170매가 넘어서 그것을 추려 올리는게 아주 고역이었던 적이 있었더랬다. 분당 2.8매 꼴이니 오죽했겠는가…
어찌됐던 그렇게 나는 고3 시절과 재수시절을 사진기를 통해서 기록했다. 내가 얼마동안 사진을 찍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클리셰로써 자주 사용하던것이 ‘솜털이 나있던 친구들의 얼굴에서 거뭇거뭇한 굵은 수염이 나기 시작했을 무렵’을 나는 사진으로 매일매일 담았다. 학교에서 만나던 매일매일, 수능을 마치고 매일매일 놀러다니던 무렵, 나는 항상 카메라로 사진을 담았고, 그것은 ‘살아있는 바이오그래피’가 되었다.
우여곡절끝에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 사진기를 꺼냈을때, 나는 생각치도 못했던 문제에 직면했다. 사진을 찍는 것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엄청난 공포가 있다는 것이었다. 나의 교양영어 선생이었던 Mr. Roney는 ‘블로그에 올리려고 하는데 혹시 사진을 찍어도 되겠냐’는 요청에 쾌히 승낙하고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가장 괜찮아 보이는 포즈를 취했더랬다.
나름 진지한 표정으로 사진 촬영 요청에 응대해준 로니씨, 요즘은 어찌지내는지...
내게 있어서 사진은 마치 펜을 들고 하는 노트 필기(note-taking)이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살았던 순간에 대한 단순한 기록이었다. 마치 다른 사람들이 펜을 들고 일기장에 자신의 일상을 적듯-혹은 나나 다른 사람들이 블로그에 일상을 기록하듯이- 나는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이오스’의 검은 마그네슘 바디는 사람들에게 사진을 찍는 것에 대한 이상한 공포감을 주었다. 이제는 너나 할것없이 가지고 있고, 역시 너나 없이 자신을 향해서 찍어 댈 정도로 익숙해진 마당에 그냥 길거리에서 컴팩트 디카를 들고 사진을 찍으면 무심코 지나갈정도로 디카에 대한 ‘공포증’이 사라진 지금이라지만, 여전히 DSLR은 그러한 대중의 ‘디카’라는 인식에서 두어 발짝 멀어져 있었고, 내가 이오스로 사진을 찍고 나면, 사진이 잘나왔는지 확인하는 내게 그거 언제 볼수 있냐는 말을 하는게 보통이었던지라 ‘대포같던’ 내 카메라와 그것을 자신을 향해 겨누던 나에게 자연스레 반감이 생긴것도 사실일테다. – 게다가 나는 매일 같이 사진을 찍어대는게 자연스러워졌던 내 고등학교 친구들에게 어느새 나 또한 적응이 되어 버렸던 터였다.
덕분에 상대편의 거친 반응이 내게는 트라우마가 되었다. 그래서 어느새 이오스가 내 생활에서 멀어져갔고, 앞서도 말했듯이 플래시까지 1.5kg짜리 이오스를 눈이오나 비가오나 들고 다니던 나의 게이지도 결국은 앙꼬(Empty)를 향해 내닫고 있었던 것이다.
공자가 가라사대, 모기 잡는데 대포를 쓰지 말지어니, 나는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 컴팩트 디카를 다시 쥐었다. 그간 우리가 똑딱이라고 폄하하던 똑딱이는 이제는 더이상 그 옛날의 똑딱이가 아녔다. 켜면 빠릿빠릿 군기 잘든 신병 마냥 전원이 들어오고 DSLR의 신속한 포커싱에 익숙해졌던 나조차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의 경쾌한 포커싱도 생겼다. 더더욱이 최근의 추세는 고 ISO에 손떨림 보정이니 그 모두를 DSLR에서 사용하던 나에게 구색이나마 도움이 됐다.
나는 다시 불이 붙었다. 손바닥보다도 작은 보디에 날렵한 카메라로 나는 그야말로 모든것을 찍었다. 나를 찍었고, 하늘을 찍었고, 친구들을 찍었다. 화질 문제에 있어서는 고해상도로 인화를 안해본 나로서는 그 차이를 구별하기는 힘들었다. 원체 나는 스냅샷이 전문이었기 때문에 어느정도의 흔들림으로 인한 선명도 저하는 숙명이었고, 그게 또 맛이었다. 즉 다시말해서 DSLR을 꿈꾸는 많은 디지털 포토그래퍼들의 숙원인 ‘쨍한 사진’과는 정 반대였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디지털 카메라로 ‘잘 찍은 사진 한장’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고 또 노력한다. 그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수백만원의 보디를 사고 또 수백만원의 렌즈를 산다. 나 또한 그런 대상중 하나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모기에게 대포를 겨누고 있었것이었는지 모른다.
얼마전 친구와 샤픈에 관한 논쟁으로 한번 대판 싸운적이 있다. 그때를 생각하면 정말 미안한데.. 솔직히 아마추어가 찍은 사진에 샤픈이 얼마나 들어가면 어떻길래 내가 그렇게 핏대를 올렸는가 생각하면 허허 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그게 결국은 우리나라 디카 유저들의 자화상이 아닐까 나는 감히 말한다. 우리가 사진을 활용해봐야 그거 전부다 출력하려면 허리가 휠터이고, 당장에 그걸 뽑아 보관하는 것 조차 일이다. 나만해도 지금 이오스를 제외하고 다른 카메라로 찍은것을 합치면 당장에 사진 라이브러리가 3만장을 넘는데, 그것들의 용도는 99% 블로그를 비롯한 웹이었다. 솔직히 기백만원짜리 카메라에 기백만원짜리 렌즈를 사봐야 ‘아웃포커스’인지 뭔지 하는 국적불명(정확히 말하면 일본에서 수입된 일본식 영어조어다… 정말 일본에서 가지가지 나쁜거 따라하는데는 일가견이 있다 우리는)의 이름을 가진 효과를 가진 샤픈 올리고 컨트라스트 올린 ‘쨍’한 사진이다.
노이즈가 얼마나 될런지 모르겠지만 그거 디씨인사이드니 레이소다니, 싸이니, 블로그니 웹에 올리면 솔직한말로 리터칭 조금만 하면 이게 이오스로 찍은건지 똑딱이로 찍은건지 짐작할 수 있는 방법은 화각이나 심도, 그리고 EXIF 정보 뿐일터. 그나마도 크기 줄이면 줄일수록 파악하기도 힘들어진다. 아마도 장담컨데 DSLR을 쓰는 사람중에서 프로페셔널이나 하이-아마추어래도 인쇄를 하거나 현상을 하면 했지, 그 사진을 원본 수준의 고해상도 파일로 웹을 올리는 사람은 Phil Askey(해외 유명 디지털 카메라 사이트 DPreview의 운영자 겸 리뷰어) 정도 밖에 없을것이다. 그나마도 우리나라 사람들 인화에 들이는 돈, 정말 아낀다. 오죽하면 3X5가 사진 인화의 기준가격일까. 4X6으로 뽑아도 크고 시원시원하고 5X8만 되도 ‘어머 주름봐, 뾰루지났네’ 그러면서 큰일이라도 날것처럼 법석떠는게 한국사람들이렸다.
조그마한 카메라를 쓰면서 좋은점은 사람들이 덜 당황한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훨씬 덜 경직되고 자연스런 사진을 찍을 수 있었고, 조그마한 몸체 덕택에 훨씬 자유로운 앵글과 그립을 사용할 수 있었다. DSLR의 무거운 몸체로 하이앵글이나 로우앵글을 사용해보시라.
솔직히 위에서 말한 ‘샤픈 논쟁’을 했던 친구가 훈수를 두기를 ‘세상 사람들이 전부다 너처럼 생각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라’고 했다. 정론이다, 하지만 오늘 뉴스를 보니 요번에도 경상수지가 적자랜다. 코흘리개 사진이나 이미 사진 커뮤니티에서 잔뜩 웹 엔트로피를 넓히는데 공헌을 하는 그렇고 그런 사진을 찍어대서 화면이나 코딱지만한 인화지로 감상하는데 1000만 화소를 육박하는 카메라를 지르는 것은 아무리 봐도 내 머리로는 합리화가 안된다. DSLR이 싸졌으니 기왕 하는거 DSLR로 사자는 사람 많이 봤다. 솔직히 그렇게 해서 재미본 브랜드도 있다. 내가 처음 컴팩트 디카를 샀을때 그 값이 105만원이었다. 그게 400만화소짜리 느려터진 녀석이었다. 지금은 그것보다 훨씬 민첩하고 잘나오는 지금 내가 쓰는 컴팩트 디카는 값이 20만원을 조금 넘는다. DSLR이 싸진만큼, 컴팩트 디카도 싸졌다. EOS20D를 사기 조금 전에 샀던 IXUS500이 50만원이 넘었는데, EOS 20D를 쓰는 동안 컴팩트 디카가 값이 절반이 됐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말은 DSLR이 싸진 만큼 컴팩트 디카도 싸졌으니, 쓰잘때기 없는 지름하지 말자는 것이다.
내가 컴퓨터를 처음 배우던 90년대 초엽에 지금은 많이 사세가 기운 삼보컴퓨터의 회장이 말하기를 ‘자동차를 타고 움직이는데 누구나 운전을 배우고 정비를 배울필요는 없다. 오토로 몰면 한달이면 배울 수 있을 뿐더러, 정비를 배울 필요는 더더욱이나 없고, 사정만 허락하면 뒷자리에 앉아서 편안히 앉아가면 그뿐’이란 말이 생각난다. 이 글을 보는 분들도 생각해보시기 바란다.
영어전용강좌 무엇인가? 영어 전용 강좌, 즉, 수업에서 영어만을 사용하는 강의를 말한다. 영어 전용 강의를 시행함으로써 학생의 학업에서의 영어 사용 능력, 즉, 듣기와 쓰기, 말하기, 토론하기, 발표하기 등과 관련한 스킬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고려대 등을 비롯한 많은 대학에서 최근 수년내에 상당수 대학이 도입하였다. 특히 고려대 같은 경우 아예 쿼타를 정해서 시행하고 있을 정도로 열성적이다.
하지만 영어 전용 강좌가 과연 그러한 본래의 취지를 다하는가는 의문이다. 영어 전용 강좌를 진행하는 교수의 능력이 영어로 주도적인 내용을 이끌만한 교수가 적은데다가 또한 그것을 따라올 수 있는 대학생도 적다. 곰이 재적하고 있는 학교에서는 영문과 1학년 전공과목을 한국어 강좌와 영어 전용 강좌를 개설하였는데, 내가 내심 걱정이 되는 것은 과연 1학년 학생들이 어떻게 영어 수업을 따라 올것인가? 라는 걱정이다. 결과적으로 두가지 시나리오가 그려진다. 수업의 본래 내용 보다는 영어 자체에 포커스가 맞춰질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또한 그렇게 됨으로써 수업의 질이 떨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본디 좋은 수업은 교수와 학생, 학생과 학생간의 다양한 상호작용(interaction)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정도의 능력이 뒷받침이 되지 않으면 토론은 고사하고 교수가 일방적으로 하는 설강 조차도 곤란하여 어휘 사용에 골머리를 앓아야 할 것이다.
또한 고학년들의 저학년생들 사냥이 가능하다. 적어도 영문과에 한하여, 영어를 수년간 공부한 학생과 이제 막 공부한 학생의 영어 발표 및 청취 스킬은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결국은 고학년의 성적 드라이브에 저학년들이 깔아주기를 해줄 것이라는 우려를 떨칠수가 없다. 이에 더불어, 영어 특기자라는 변수를 생각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이미 많은 대학이 국제화라는 이름하에 많은 외국어, 특히 영어에 능통한 학생들을 선발하고 있다. 내가 아는 그러한 영어특기자 중에는 토플 점수(CBT)가 280을 넘는 학생도 있다. 절대적으로 보았을때도 결코 낮은 점수라고 할 수는 없지만, 상대적으로 수능이나 내신 영어를 통해 입시를 거친 학생에 비해서 외국어 특기자는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지만(참고로 우리학년도의 영어 특기자는 우리과에 10명 남짓으로 알고 있다), 외국어 강의에 있어서 단지 ‘영어를 잘한다’라는 이유로 어드밴티지가 작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많은 학생들이 중도 포기하고 있으며, 애초에 개설이 되고 나서도 신청하는 학생이 적어 폐강 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언어 능력을 비록 배제하거나 교수가 임의로 핸디캡을 적용한다 할지라도, 결국은 교수가 수업 내용을 맨 투맨으로 수준에 맞춰 ‘떠먹여’ 줄 수는 없다. 설령 이러이러한 점이 나옵니다라고 얘기를 해준다 할지라도시험 문제를 읽는 속도가 차이가 날수밖에 없다. 국어 강좌를 들은 학생과의 형평성은 차처하고 말이다.
이에 대해서 수개월전에 한 영자 신문의 Op-Ed란에 부산의 한 대학의 초빙 교수로 있는 한 외국인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기를, 영어 전용 강의를 강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만일 한다면 전문적인 이해가 필수적인 전공과목이나 전문과목 보다는 교양강좌가 적합하며, 수많은 영어 회화 강의를 하는 외국인 강사의 다양한 경험을 살려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우리나라의 대입 교육 정책은 항상 수년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 정책’이라는 질타를 받아왔다. 유감스럽게도 대학의 교육정책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는 않다. 토익점수의 졸업 요건이나 각종 인증제처럼 영어 전용 강의도 하나의 트렌드일지 모르고, 얼마지 않아 또 사문화될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만일 영어 전용 강의가 앞서 시작된 사문화된 유행에 전철을 밟지 않기를 위해서는 보다 합리적인 방법을 강구해야할 것으로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한두개의 유명 대학이 한다고 해서 무조건 따라하고 보자는 대학 행정의 근시안성의 개선이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