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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은 너의 거짓말, SHIRO BAKO(시로바코)

2014년 4분기(겨울) 애니메이션은 지금 다시 돌이켜봐도 대단합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분기가 다시 올까?” 싶을 정도로 좋은 작품이 많았습니다. 정말 좋아하는 작품이 분기마다 나오기 마련이고, 소위 말하는 “인생작”이 가끔 나타납니다만, 이게 한꺼번에 두 번 나타나는건 정말 장난이 아닌건 사실이죠. 4월은 너의 거짓말과 SHIRO BAKO(시로바코)가 이때 방영되었었는데요. 둘 다 정말 좋았던 작품입니다.

2쿨 작품은 블루레이를 되도록이면 안모으려고 합니다. 최소한 7권에서 많게는 <빙과>처럼 11권을 모아야 하는 경우가 있어서 거의 1년을 달려야 하기 때문에 저는 이걸 마라톤에 비유하곤 합니다. 돈도 돈이지만 시간이 많이 걸려요. 그래서 당시에는 2쿨은 포기했기 때문에 소드 아트 온라인 II 도 포기를 했었던 기억이 납니다(지금은 좀 후회가 됩니다).

이 작품들은 모두 2쿨 작품이고 제가 세운 ‘2쿨은 안모은다’라는 철칙을 스스로 저버리게 만들었습니다. 정말 이 둘은 그럴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마라톤’을 달렸습니다. 그것도 두개를 동시에. 각각 4월은 너의 거짓말이 9권, 시로바코가 8권이었죠.

4월은 너의 거짓말은 음악 애니메이션입니다. 거기에 보이 미츠 걸이라는 왕도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음악을 하는 소년 소녀가 만나서 서로를 어떻게 변화하게 만드는지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움츠러 들어있는 소년에게 소녀가 다가가서 구석에서 끌어내죠. 그렇게 절반을 사용하고 이번에는 병약한 소녀에게 초점이 옮아갑니다. 쓰러진 소녀를 소년이 일으키는 이야기가 후반을 차지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결말은 굉장히 슬프지만 사춘기 때 겪었던 일들이 으레 그렇듯이 아마 훌훌 털고 앞으로 나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남긴체 끝납니다. 물론 남자는 첫사랑을 평생 기억한다고 하던가요? 소년이 “잊지 않아 줄 거지?”라는 소녀의 질문에 “잊으면 귀신이 되서 나타날 거면서”라고 혼잣말로 대답하는데요. 아마 평생 잊혀지지 않을 겁니다.

완벽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화제가 되었던 오프닝도 그렇고 전반적으로 안정적인 그림과 초반의 연주부분에 엄청난 힘이 들어간 것도 화제였습니다. 인기를 끌었었던 만화가 원작이었는데 원작과 비슷하게 끝나며 원작을 충실히 따라간 것도 호평을 받았습니다. 실시간으로 이 작품을 한 주 한 주 쫓아 간것은 저에게 있어서 행복한 시기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은 시로바코(SHIRO BAKO)입니다. 아마 “당신이 여즉 본 애니메이션 중에서 그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가장 많은 것이 변한 것을 고르라”고 한다면 이걸 고를 것 같습니다. 애니메이션 업계를 다룬 애니메이션인 이 작품은 애니메이션을 보는 각도를 다르게 보게 만들었고 이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보충 삼아 찾은 애니메이션 제작 관련 지식이 이후에 나오는 그리고 지금까지 봤던 애니메이션을 보는데 다대한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입니다.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젊은 여성들과 그 주변의 군상극이라고 하면 될 것 같은데 정말로 수십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주인공들을 사이에 두고 얽히고 섥힙니다. 일이 정체되고 사람이 싸우고 시간에 쫓기고 다종다양한 역경을 거쳐서 주인공이 작품의 완성을 맞이하는 장면을 볼때까지 실시간으로 방영을 쫓던 시기에는 다음화가 얼른 나와라 하면서 좀이 쑤시던 작품입니다. 이 작품에서는 전체 화수를 둘로 나눠서 전반에 한 작품 후반에 한 작품, 총 두 작품을 주인공(들)과 주변인물들이 완성하는 것이 커다란 줄기입니다만 이야기 막바지에는 정말 울음을 참기 힘듭니다. (여담으로 그 장면에서는 주인공도 우는데 그 장면이 참 예쁘게 그려졌습니다, 베테랑 애니메이터가 그렸다고 합니다)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을 꼽으라 그러면 여러가지를 더 꼽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4년 4분기에서 2015년 1분기에 걸쳐서 방영했던 이 두 작품은 앞으로 한 동안은 잊기 힘들것 같습니다. 어쩌면 지금 제가 그때 만큼 왕성하게 덕질을 하지 못하는 까닭이 있는 탓도 있지만 앞으로 이런 분기가 또 다시 올까 싶을 정도에요. 이중적이지만 지갑을 걱정하면서도 그럴 때가 오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넷플릭스 사태와 오타쿠 그리고 서브컬처

’넷플릭스 쇼크’를 겪고 저는 아래와 같은 트윗을 했었습니다.

사실 이런 논리는 꽤나 위험합니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당하던거 너희도 당해서 꼴좋다 같이 들릴 수 있으니까요. 사실 모든 심의 검열은 최소화되어야 한다는 제 지론 상, 너나 할 것 없이 큰 사건입니다. 다만 소위 ’하이컬처’를 즐기시는 분들도 서브컬처를 즐기는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당하는 불합리함에 대해 이해해 주길 바랄 뿐입니다.

사실 이건 복합적인 생각이 있습니다. 이전 포스트에서 방송이 세분화되서 더 이상 만인을 위한 방송이 아니라고 얘기했지만 심의 당국에선 그렇게 생각 안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비즈니스 측면에서도 어느정도는 이유가 있지 않다 싶습니다. 글에서 애니플러스와 애니맥스를 들었습니다만 유감스럽게도 이 채널은 만인을 위한 방송이 아니다보니 시청률이 매우 낮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모르지만 높지는 않을겁니다. 오죽하면 진격의 거인 때 살짝 오른걸로 모두가 떠들석했겠습니까? 당시 애니플러스는 일본에서 가장 빠른 방송국에서 방송한 당일에(일본 애니메이션은 방송국에 따라 전국 모두에 방송되는데 시간이 걸립니다) 방송했습니다. 몇차례 앞당기다가 그렇게 된 것이죠. 19세 시청가로 방영되었지 싶지만 그걸 모두가 다 지켰나는 모르겠습니다.

사실 오타쿠 시청자 입장에서는 블러나 광선처리 혹은 편집이 매우 불만스러울 수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 외연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일부 표현에 대해서는 사업전략적으로 자숙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저희 집의 경우 제가 학교를 가기 전에도 텔레비전이 방에 있었기 때문에 어느정도 보는 내용에 대한 프라이버시가 있었습니다만 모두가 그렇지는 않을겁니다. 어느정도는 부모님들의 양해나 묵인이 필요할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자숙이 필요할지 모릅니다.

제가 모 라이트노벨의 이미 나온책 품귀가 지속되고 후속권이 나오지 않아서 출판 계획에 대해 묻기 위해 출판사에 문의를 했더니, ’방학이 되면 재판을 찍고 후속권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군요. ’아시겠지만 학생들이 주로 보니까요’라며 말이죠.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몇 년이 됐나 싶으니 좀 멋쩍습니다만. 뭐 그런말이 있더군요. ’나이 먹고도 만화에 돈을 쓰냐’는 거였죠. 뭐 IT 제품이나 자동차에도 돈을 썼었고 사진도 요즘 잘 안찍는다 뿐이지 나름 할건 다 하는데 말이죠. 남이라면 왠 오지랖이니 하겠지만 아버지가 그러시니 허허 웃고 넘어가는 수 밖에요.

그 출판사는 라이트노벨을 비롯해서 만화 잡지와 단행본 등을 출판하는 꽤 역사와 규모가 있는 회사입니다. 그곳의 편집자의 생각을 통해 ’서브컬처’의 주 소비자를 대충 가늠할 수 있죠. 아쉽지만 그런겁니다. 그러니 자숙할 필요가 있지요.

애니플러스가 방영한 작품에서 지금까지도 회자될 정도로 화제작이라면 소드 아트 온라인을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에 걸맞게 심의 당국과 곤혹스러운 마찰이 있었습니다. 캐릭터를 게임의 마비 상태에 빠트린 상태에서 공격하는 장면과 역시 게임 캐릭터를 난도질하는 장면이 문제가 됐죠(하나가 더 있지만 이건 대개가 납득할 정도였습니다. 사유로 적은 문장 표현을 두고 웃음거리가 되긴 했지만요). 빙과라는 작품에서는 소품용 잘린 손목이 문제를 일으켰지요. 아마 애니플러스의 방송은 그 이전과 그 이후로 나뉠 정도로 편집증적인 편집(말장난 같군요)을 하게 되었지 싶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저는 실사 영상물이든 애니메이션이든 최소한의 심의 규제가 이뤄져야 한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서브컬처를 저속하다고 보는 ‘점잖은’ 여러분의 생각도 변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정하고 싶든 아니든 서브컬처는 규모가 크진 않을지언정 엄연히 합법적으로 굴러가는 하나의 산업입니다. 여러분의 젊잖은 시각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그보다 더 보수적인 심의 당국의 생각이 변할리 없겠지요. 넷플릭스에서 겪은 어처구니 없는 심의를 보시면서 체념하듯 트윗했습니다만, 이제 오타쿠가 아닌 여러분도 뭐가 문제인지 아시게 됐습니다. 남의 일이 아닙니다. 오타쿠와 비 오타쿠 모두 이 문제에 하나로 되서 싸울 필요가 있습니다. 왜인지 마르틴 뉘밀러의 유명한 글귀가 떠오릅니다.

First they came for the Socialists, and I did not speak out—
Because I was not a Socialist.

Then they came for the Trade Unionists, and I did not speak out—
Because I was not a Trade Unionist.

Then they came for the Jews, and I did not speak out—
Because I was not a Jew.

Then they came for me—and there was no one left to speak for me.

— “First they came…” Martin Niemöller

마지막으로 오타쿠 여러분에게도 한마디 드릴 것이 있습니다. 물론 어떤 일이든 예외가 있지만 여러분이 하시는 일은 떳떳한 행위입니다. 위축될 필요가 없어요. 물론 그것은 여러분이 정당한 대가를 치르고 사회적인 책임을 질때 얘기입니다. 자유와 방종이 다르다는 말은 귀에 박히도록 듣습니다. 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사회의 일원으로써 책임을 져야 합니다. 물론 불합리한 심의에는 맞서 싸워야 하지만 그렇다고 아동 포르노나 상궤를 벗어나는 것까지 인정받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서브컬쳐 – 그 장도리 좀 놓고 얘기합시다.

’이것은 픽션입니다’

소위 ‘서브컬처(subculture)’를 ‘파게’되면 좋건 싫건 내향적이 된다. 여기서 말하는 내향적이라는 것은 실제 본인의 성격이 아니라, 본인의 취향에 대해서 해당하는 말일 것이다. 이름 자체가 암시하듯이 주류인 ‘메인 컬쳐(main culture)’ 또는 ‘하이 컬쳐(high culture)’의 하위 문화로써 자타가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서브컬쳐를 향유하는 집단 자신도 본의 아니게 움츠려 드는 경우가 있다. 시대가 흐르면서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만화나 애니메이션, 게임을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사람에 따라, 시대에 따라 정도는 다르나) 여겼으며. 덕분에 서브컬쳐를 즐기는 사람들은 본의던 아니던 자신이 몰두하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는 ‘죄의식’을 가지고 접하게 된다. 악당이 악당끼리 소속감을 가지며 어울리듯이 (결코 이게 나쁘단 의미는 아니지만) 서브컬쳐를 향유하는 사람들은 서로를 일정한 소속감과 연대감을 가지고 대하고 있으며, 소위 ‘일반인’들에 대해 방어적이고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적어도, 자신이 하고 몰두하고 있는 것이 ‘주류’의 인식에서 환영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흔히들 ‘오덕’이라고 불리는 서브컬쳐 팬들은 대개 ’내향적’으로 몸을 웅크리고 운신을 하며 자신의 취미가 대놓고 드러나지 않도록(‘일코’하며) 조용조용 즐기는 것이 일반적이겠다. 그러다가도 자신의 취미를 아는 사람과 이해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야말로 화기애애 해지는 것도 드문 일은 아니다. 뭐 반대로 언제부터 알았나 싶을 정도로 상극처럼 싸울 수도 있다. ‘겨우’ 자기가 미는 캐릭터 가지고. (라고 하면 나는 양쪽에서 돌을 맞을 것이다)

죄책감은 어디서 오는가? – 그리고 왜 이 글을 쓰는가?

소위 서브컬쳐를 공격하거나 비하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리비도나 패티시를 자극하는 말초적이고 노골적인 내용이며, 따라서 그것을 보는 것은, 더군다나 청소년이 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뭐 이런 얘기가 되지 않을까? 물론 실제 표현은 이것보다 더 빙빙 돌아 정중할 수도, 이것보다 스트레이트하고 과격할 수도 있다. 나는 이런 생각에 대해서 일일히 반박할 생각은 없다. 사람은 단순한 동물이 아니다. 극히 사욕을 배제하는 삶을 사는 종교인부터 마냥 오늘이라도 세상이 끝날 것 같이 사는 사람도 있는 것이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둘을 강제로 앉혀 놓고 서로의 당위성을 주장해서 설득시키시오 라고 주문을 내린들, 아마 그 둘이 진심으로 이해를 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애당초 그런 ‘깊은 이해’가 가능했다면 인류사의 이념과 사상, 종교를 두고 벌어진 전쟁이 존재했던 그리고 존재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사람은 단순한 동물이 아니므로 그렇다고 해서 영원히 커뮤니케이션을 끊고 ‘냉전’상태로 있을 수만은 없다. 나 또한 결국 누군가의 이웃이고, 어느 동네의 주민이며 어느 사회의 구성원이다. 나는 그들을 만나고 접해야 하며,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과 살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그들도 나를 만나고 접하며, 나를 이해하고 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이해하십시오’라고 할 수는 없으므로, 나는 이렇게 글을 써서 ‘이것은 이렇습니다’라고 설명 해야겠다.

그러니 내가 이렇게 설명함으로 당신은 ‘그렇군요’라고 생각하고 서브컬쳐를, 그리고 그것을 즐기는 사람을 단지 그들이 즐기는 물건이 아니라 ‘그 자신’을 보고 이해하기를 바라는 것이 목표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서브컬쳐에 대해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영화 좋아하세요?

제일 먼저 생각해볼 것은 정말로 라이트 노벨이나 애니메이션, 이건 내 전문 분야는 아니지만 게임은 정말로 유해한가, 라는 질문이다. 물론 이 주제를 꺼내기만 해도 폭력적이고, 선정적이며, 음란하다 라는 조건반사적인 반감 내지는 선입관을 가진 분들이 없지 않아 계시겠지만, 한 번 크게 심호흡하고 좀 더 자세히 보자는 것이다. 초등학교(국민학교)때 그렇게 싫으면서도 공부라는 명목으로 개구리 등의 동물을 직접 해부하거나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1. 하다 못해 그런 기분으로라도 실눈을 뜨고서라도 한 번 살펴보자.

사실 비유라고는 하나 본인의 취미를 산 동물을 문자 그대로 도륙하는 행위에 비유하는 것은 결코 즐거운 일은 아니다(그걸 일로 하시는 분에게는 죄송하지만). 아마 이 글을 읽는 분 중에서 적지 않은 분께서 이 자식 뭐라는 거야? 라고 생각하신 분이 계시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보기에 정말로 일부는 산 개구리 해부하는 것처럼 혐오감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 없잖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눈에게는 서브컬쳐 팬이 개구리를 무자비하게 있는 대로 도륙하는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쯤으로 보이는 건 아닐까?

라이트노벨이나 애니메이션의 팬이 아니라면 아마 최근의 애니메이션이나 라이트노벨은 정말로 한심하게 보일 지도 모르겠다. 왜 이렇게 알기 쉽게 선정적이고 단순무식하게 폭력적이며 자극적일까? 정말 이런거에나 몰두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는거람? 이라고 말이다. 뭐 그건 즐기는 내가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있으니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아마, 이것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업계에서도 팬들도 자각하고 있으리라. 나이가 든 서브컬쳐 팬들은 소위 ‘모에’라고 불리는, 도대체 이걸 어떻게 번역해서 소개해야 좋을지 싶은 뭐, 굳이 말하자면 일종의 패티시즘에 집착하지 않았어, 라고 입맛을 쩝쩝 다시는 걸 종종 보곤 한다. 아니, 이미 내 나이가 벌써 그런 입맛을 쩝쩝 다시는 쪽에 더 가깝다. 다시 말하자면 서브컬쳐를 즐기는 당신의 가족, 친구, 이웃 혹은 동료도 이 문제를 잘 알고 있다는 얘기다.

혹시 영화를 좋아하나? 예, 아니오의 2택문제가 되면 아마 대개의 한국인들은 주저하더라도, 질문을 고쳐 굳이 말하자면 어느 편입니까? 라고 말한다면 대개 그런 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건 사실 물어 볼 필요도 없다. 한국인들은 전세계에서 영화를 가장 많이 보는 나라 사람들 중 하나다. 그렇지 않다면 이 작은 나라에서 1천만 관객이 드는 영화가 그렇게 팡팡 샘 솟듯 나오는 것은 불가능하리라. 전 국민의 4명 중 한 명이 봤단 말이다. 이게 말처럼 우스운 얘기가 아니다.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보자, 천만 관객이 든 영화는 아니지만 칸느를 탔던 영화인 올드보이를 한번 예를 들어 보고 싶다, 최민식은 장도리 하나 들고 ‘예의 그 복도 신’에서 몇 명을 찍어 누르고 휘두르며 뚫고 갔으며 오달수의 이빨을 몇 개나 해먹었던가. 그리고 그가 무얼 알고 그렇게 실성했던가. 서양인들은 왜 그렇게 최민식이 산낙지를 하나 잡아먹는거에 그렇게 파르르 떨었던가.

그래서, 혹시 올드보이를 보았는가? 그렇다면 혹시 당신의 기분은? 슬슬 집 신발장에 있는 공구함에 있는 망치를 만지작 거리고 계시진 않은가? 아닐거라 믿는다. 뭐 그런 영화를 이런 곳에 비유를 하는 것이 어찌보면 불경스러울 수 있으나, 나는 문화에 귀천이 없다고 배워왔다(‘문화 상대 주의’).

우리는 올드보이를 극장 옆자리에서 본 사람이 갑자기 최민식의 연기와 박찬욱 감독의 연출에 감화(?)되서 현실 따위 잊어버리고 둔기를 내 앞에서, 혹은 집에 돌아가서 휘두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건 음, 그러니까 소위 말하는 믿음이다. 그 믿음을 나도 가지고 있고, 옆에서 강혜정와 최민식의 정사씬에서 팝콘 먹던 손을 멈추던 사람도 가지고 있다. 아마, 서로 ‘나는 안 그래, 저 사람도 그러겠지’ 라고 생각할 것이다. 아마 그런 믿음이 깨지는 순간, 우리는 극장에서 불이 들어오는 순간 의심암귀에 빠질 것이다. 아니 가만히 앉아 있질 못하겠지, 최근 극장에서는 보다 실감나는 감상을 위해서 바람이 불고 좌석이 흔들리는 체험을 돈을 더내고 한다. 하지만 공짜로라도 머리 뒤에서 장도리가 날아온다는데 집중이 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나이가 드러나는 것 같고, 탈법행위라 그다지 자랑스럽진 않지만 재미있는 얘기를 해주자면, 나는 올드보이를 고등학생 때 그것도 (친)엄마와 함께 가서 봤다. 이게 얼마나 얼척이 없는 상황인지,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다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최민식에 끌렸지 이런 영화인 줄은 몰랐다니깐, 정말로. 제 아무리 오만 쓸 때 없는걸 기억하는게 특기라고 해도 그때 팝콘을 가져갔는지 가져갔는데 먹는 손이 멈췄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 장면에서 두 사람이 얼마나 난감했으며 최민식과 유지태의 모든게 드러나고 극장에서 나올 때 엄마가 질리면서 손사래를 친건 아무래도 아직 기억한다. 나도 그때 허를 찔려서 난감하게 웃을 뿐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런 영화인줄 모르고 들어갔다니깐. 반성한다. 잘못했습니다.

해서, 다정다감하고 혈기 왕성하며 감수성이 예민하고 ‘그런 것’에 영향을 받기 쉽다는 그런 시기 한창 때, 나는 엄마와 그 영화를 보았다. 그리고, 알다시피 나는 사람에게도 물건에게도 장도리를 휘두르지 않았다. 장도리는 공구함에서 본래 본분을 위해 잠자고 있다. 애시당초 벽에 구멍내기 싫어서 접착제로 거는 고리를 더 많이 쓰지만.

나는 여기서 올드보이의 평론을 하자는게 아니다. 당신도 나도 그리고 아마도 누군가도 최민식에 주화입마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 중요하다. 아니 솔직히 존재 했다 치더라도 누구도 그 ‘프레임’으로 보지 않았다는게 중요하다. 아, 저 자식 올드보이 봤구만, 이라거나 올드보이 보면 저러는구나 한 사람은 없다는 얘기다. 천만 관객은 아녔지만, 당시 기준으론 꽤 흥행했잖나? 상도 타서 나라가 들썩였고. 그 기억이 충격적이라 그런지는 모르나, 손에 꼽을 정도로 좋아하는 영화인지라 예는 이걸로 들었지만, 아마 대개 어지간한 작품이라면 굳이 예시를 들 것도 없이 거의 다 들어 맞을 것이다.

여기까지 잘 따라왔는가? 그렇다면 한번 묻겠다. 왜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등을 보는 사람은 당신 옆에서 장도리를 휘두를 것 마냥 생각하나? 어째서 서브컬쳐만 유해한가?

뭐, 나와 엄마는 탈법을 해서 등급분류를 어기고 관람했다지만, 엄연히 올드보이는 19세 이상 관람가(혹은 이에 준하는 등급)였다. 쉽게 말해서 ‘그런 것에 감수성이 있는’ 청소년들은 볼 수가 없다는 얘기다. 그리고 설령 봤다 하더라도 올드보이가 누군가를 눈을 희번득하며 장도리를 휘두르는 사람으로 자라게 하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이가 먹어서 감화를 받아 장도리를 휘둘렀든, 나이를 덜먹어 장도리를 휘두르도록 자랐든, 우리는 상상이 아니라 현실에서 장도리를 휘두르는 사람을 한마디로 설명한다 ‘미쳤다’라고(결코 정신질환 환자를 비하할 의도는 아니지만). 만약 당신의 가까운 누군가가 장도리를 벽에 못박는 용도 이외로 사용하는걸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는걸 본다면 적당히 피할 준비를 하며 진지하게 전문가의 상담을 받으라고 권할 것을 추천한다. 수틀리면 머리에 깍지끼고 걸음아 나 살려 하고 그 자릴 피하고 보자.

수동적 안전과 능동적 안전

얼마전까지 차를 한 대 가지고 있었다. 과분할 정도로 좋은 차였고 딜러가 감탄할 정도로 아껴 탔지만 대중교통을 더 많이 이용하는지라 그냥 약간 이문이 남는 선에서 적당히 매각했다. 그 차를 사니깐 전공서적같은 매뉴얼이 따라 왔다. 나는 그런걸 읽는걸 좋아하는지라 쭉 일회독을 하고, 차를 타면서 페이지를 넘겨가며 버튼이나 각부를 점검해보고 사용해봤다.

정말 좋은 차였다. 솔직히 물욕이 넘치는 나로써는 그냥 껴안고 있는게 좋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고, 차를 매각한다고 하니 절친한 친구 녀석도 아깝다고 했을 정도니까, 에어백도 전 좌석에 달려 있고, 최신식 자세제어시스템이나 브레이크 시스템을 비롯해서 뭐 영화같은 수준인 최첨단까지는 아니더라도 있을 것은 다 있는 좋은 차였다. 그렇지만 차의 설명서는 반드시 안전벨트를 착용하라고 했고, 그 차를 인도장에서 넘겨 받고 끌고 나가면서 갑자기 스타카토 마냥 점점 크게 울려대는 경보장치가 운전석이나 조수석에 시트에 사람이 앉았는데 시트 벨트를 한 사람이라도 안하면 맬때까지 죽어라 울려대는 장치라는걸 차에서 빽빽 초침처럼 비명을 질러대는 와중에 황급하게 세일즈맨에게 전화를 해서 물어보고서는 알았다.

차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 아니 뉴스라도 본 사람이라면 ‘결정적인 순간’에 에어백이나 ABS 보다는 안전벨트를 제대로 하는게 더 중요하다는 걸 상식선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에어백, ABS나 차세제어장치(VSC)가 뛰어나더라도 눈비가 오는 날이나 빙판에서는 서행해서 조심히 몰지 않으면 이겨나지 않는다. 결정적으로 안전벨트를 매지 않으면 말짱 황이라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안전벨트를 매고, 위험하다 싶으면 전조등을 켜고 서행해서 운전한다. 조수석에 앉아 있는데 만약 운전자가 그러지 않는다면 나라면, ‘벨트 해’,’박을라, 속도 좀 줄여’라고 하겠지.

영화 같은 영상물, 그리고 방송, 출판물에는 관람과 지도에 도움이 되도록 연령 등급을 매기고 있다. 그러니까 사실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나는 엄마와 올드보이를 보는 것은 말도 안되는 얘기였고, 설상 보려고 했다면 그것을 직원은 제지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불행스럽게도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19세 등급 영화표를 들고 가면 입장구에서 일일히 신분증을 까보는 꼼꼼함이 갖춰지지는 않았다. 지금은 어떤가? ‘언제까지 2003년적 얘기를 떠드는 거람?’ 할 것이다2.

나는 혼자 산다. 혼자 살기에는 지나치게 넓은 감이 있지만, 이 집에는 혼자 산다. 애가 없다는 얘기다. IPTV를 설치해주러 몇대에 걸쳐 몇번인가 왔지만, 기사는 애가 없는 독신이라는 것을 알고는 ‘알아서’ 기본적으로 켜져있는 연령제한 기능을 꺼주고 갔다.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전원이 꺼지는 기능과 같이 한꺼번에 능숙하게 마치 내가 키보드를 두드리거나 게이머가 마우스라도 만지작 거리듯이 리모컨을 능숙하게 움직여 끄고 아무 채널이나 휙휙 넘긴 다음 다 됐다면서 리모컨을 건네주고 돌아갔다. 이것도 처음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처음에는 내가 일일히 셋업에 들어가서 초기 암호를 누르고 꺼야 했다. 기사에 따라서는 애가 없냐를 한번 더 확인하곤 했지만 아무튼 나중엔 다 알아서 꺼줬다. 아마 그걸 하는 이유는 멀쩡히 잘보다가 갑자기 19세 등급이 뜨기만 하면 화면이 꺼지면서 암호를 누르라고 나온다는 어린 자녀 없는 가입자의 항의나 문의에 시달려서일 거라고 간단히 추정이 가능하다.

올드보이를 보고 나오면서 우리 엄마는 진덜머리를 내면서 워딩은 기억 안나지만 최소한 ’아직은’ 따라하지 말라고 했던 것 같다. 본인이 데리고 왔으면서 무슨 소리람 싶지만 어찌됐던 최소한의 교육은 (과연 그 작품을 보고 나서는) 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 안전장치는 존재하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건 조심히 운전하는 버릇과 안전벨트 착용이듯, 컨텐츠에 있어서도 중요한 것은 컨텐츠에 대한 올바른 취급과 올바른 등급에 대한 보호자의 지도이다. 어떤 안전장치가 존재할 수 있지만 결국 어기고자 한다면 그것을 돌파하는 것은 불가능은 아니다.

한편, 아무리 고까워 저게 뭐람 싶겠지만, 최소한 이건 법의 테두리안에 있다. 아무리 성에 개방적인 나라가 일본이고 그 나라에서 나온 애니메이션과 책에 몰두 한다지만, 일본에서도 새벽 서너시에 하는 애니메이션이 너무 막나간다 싶으면 학부모 단체가 심의기구에 쪼아대서 방송국을 갈궈 규제를 하고, 도가 지나친 책은 지역 교육 당국3이 서점에서 회수나 중판 중지를 요구한다. 최소한 상업적으로 소비되는 컨텐츠는 이러하다. 우리나라에 수입되서 사후심의를 전제로 팔리는 물건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정말 문제가 되는건 이 ‘테두리’를 벗어나는 물건이다. 우리는 이것과는 비교도 안되게 위험한 물건(몰카라던가, 무슨 웹사이트라던가)을 만지거나, 실제 범죄에 손을 대는 ‘미친 사람’을 일상적으로 씹어대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리고 솔직히 이정도로 자기비하를 해놓고 무슨 소린가 싶겠지만, 널리 유통되는 서브컬쳐물과 그들의 범죄행위에 유의미한 합리적 접점을 찾지 못하겠다.

혹자는 이렇게 얘기할지 모른다. 그 유치한 것, 선정적인 것 읽어서 뭐하냐고. 애들 보면 좋을게 뭐 있냐고. 하지만 괜찮다. 요즘 그러잖아도 책 안 사 보는건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그거라도 읽으면서 활자에 익숙해지면 본인에게도 좋고 책으로 밥벌어 먹는 사람에게도 좋은 일이다. 어릴때 그림책과 커다란 글자 책으로 시작하듯이 이렇게 활자를 접하는 사람이 나이 먹으면 (대개는) 알아서 다른 책도 읽는다. 어린 동생이나 자녀가 너무 그런 책에’만’ 빠져 있으면 단 군것질만 먹지 말고 영양가 있는 야채나 과일도 먹으라는 투로 조용히 한마디 하면 다 알아 먹는다. 애당초 이해실리를 약삭 빠르게 계산하는 요즘 같은 세대들이 그런걸 귀중한 용돈 깎아 스스로 사서 찾아보고 재밌다고 이해할 나이면 그 정도 생각은 있다4.

왜 그렇게 진지하세요, 이게 다 재미잖아요.

물론, 칸느의 주단을 밟은 올드보이가 단순히라도 오락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영화를 보는데 있어서 역시 늘 그렇다고 할 수는 없어도 역시 중요시 여기는 것은 ‘재미’ 혹은 ‘흥미’다, 심지어는 지난 세기의 흑백 무성영화라 할지라도 누군가는 그 화면속 인물이나 구도, 촬영본 자체에 ‘재미’나 ‘즐거움’을 느낄지 모른다. 지독하게 재미없게 못만든 괴작이라 할지라도 누군가에게는 그 사실만으로도 ‘흥미’가 있어 찾아보거나 소장하게 될지 모르는 노릇이다. 인지 부조화일지는 모르나 수면제처럼 졸린 영화라도 그 영화에 숨겨진 의미를 찾는 재미라도 있어야 한다. 어떠한 재미나 즐거움도 주지 못하는 영화는 그야말로 흥미를 일으키지 않으므로 그야말로 총체적인 실패작이다. 흥미가 곧 호기심이고 호기심이 곧 발견이니. 그야말로 외면이요, 자기 위안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올드보이의 스토리를 얘기하지 않고도 십이년 전 영화의 예를 들어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것도, ‘장도리를 휘두르는 그 복도 씬’이나 오달수를 고문하는 장면 등 도처에 깔린 장면에서 폭력을 넘어서는 쾌감과 아름다움을 발견한 강렬한 기억 때문이고, 그 장면 장면들이 실제로 한국 영화사, 아니 세계 영화사에 있어서 보편적으로 남아 통할 수 있는 기억이니 당신도 알아먹을 수 있는 것일 때문일테다.

역시, 서점 한켠에 줄러리 꽂혀진 비정상적인 비례로 그려진 여자아이나 유치해 보이는 휘황찬란한 복장을 한 일러스트가 그려진 책이나 만화를 보거나 채널 재핑을 하다보니 이걸 누가 보는 거람 싶을 정도로 노골적으로 특정 부위를 강조하는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고개를 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결국 그것도 (그것들 전부가 내 취향은 아니지만)본질적으로 누군가의 재미나 흥미, 즐거움을 끌기 위해서 그런 것이다, 오락이 밥 먹여 주지 않는다, 필수품이 아닌 물건을 팔기 위해서는 유인 요소가 필요하다. 어이 없이 비싼 명품의 로고 같이 알기 쉽게 노골적인. 내가 스스로 말하는건 뭐하지만 동네에서는 아마 대놓고 드러내지 않으니 (비록 어딘가 일을 나가는 것 같지는 않지만) 친절하고 인사 잘하며 수다 잘 떠는 (노)총각이 그런데 흥미가 있는지 생각이나 하겠냐만서도, 생각 좀 하면 좀 어떤가 싶다. 누가 뭐라던 나는 친절하고 인사를 잘하며 수다를 잘떠는 이웃이다. 쓰레기는 이른 아침 재활용품과 매립용, 음식물을 각각 분리수거하며, 젊은 이웃에게도 동네 어르신에게도 낯이 익은 사람을 다시 만나 눈이 마주치면 과연 90도 까진 아니더라도 목례 정도는 한다, 꼬마 애들한테 함부로 반말 하지도 않는다. 보편적으로 보면 (지병 때문에 일 안하고 대낮에 돌아다녀서 문제지, 그걸 알까마는) 사회적인 내지는 하다못해 인격적인 결함이 있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최소한 공원에서 매번 인사하는 할머니가 설령 피만 보면 경기를 일으키는데 해부 실습에 서 있는 초등학생처럼 서브컬쳐를 싫어하더라도 적어도 내가 하다 못해 대낮에 공원에 서서 허공에 장도리를 휘두르지 않는 이상 내 뒤에서 뒷담화를 깔 것 같지는 않다. 얘기했지 않나, 의심암귀가 되면 끝이 없다고. “믿으세요, 할머니. 저도 믿으니까요. 그리고 믿으세요, 아마 여러분 옆에 있는 ‘오덕’도 대체로 무해합니다. 나는 여러분을 믿습니다.”

그 장도리 좀 내려놓고 얘기합시다.

어디선가 요즘 젊은이가 불쌍하다는 컬럼을 읽은 적이 있다. 누구가 썼더라5, 아무튼 자신이 젊을 때와는 달리 요즘은 도처에 개봉관이 있지만, 그와 비례해서 젊은이들이 귀중한 젊은 여가를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고 시간을 때우는 것을 아쉬워 하는 글이었다. 단순히 세월 타령에 한탄이 섞인 꼰댓소리가 아니라, 요즘엔 그거 정도가 값싸게 즐길 수 있는 여가라는 안타까움이었다. 영화의 예를 들면서 천만 관객을 운운했던건 사실 아마 이 글에서 따온거라고 솔직히 인정한다. 서브컬쳐도 결국 (여느 기호가 다 그렇듯 사람에 따라 다르나) 비교적 저렴하고 쉬운 여가이자 오락이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법을 범하지 않고 소중한 끼니를 살 돈을 벌게 해주는 직장을 만드는 하나의 산업이다. 왜 차별을 받아야 하나?

요즘 극장은 거의 다 넓직한 상업시설에 들어 있는 경우가 많다. 영화를 보면서 어처구니 없게 비싼 팝콘과 콜라를 먹으면서 제작자들과 배급투자자, 극장6 그리고 거기서 일하는 알바와 직원들에게 유의미한 시간을 보낸 다음 우리는 검은 상영관을 뒤로 하고 출구 통로를 걸어 나가면 눈부실 정도로 밝은 점내 조명을 한 상점들이 우리를 반긴다. 우리는 그렇게 누군가가 웃다 자지러지고, 오열하고, 쓰러지고, 죽고, 무언가가 부서지고, 터지고 사라지는 세상을 뒤로 하고 잠시간의 여흥 끝에 현실에 떨어진다.

상영관을 같이 나서서 (아마 상영관 출구라 임대료에 프리미엄이 있을) 상점을 두리번 거리는 옆 사람이 내 뒷통수를 장도리로 후갈기지 않을 거라는걸 우리는 알고 있다. 왜 이러나? 이게 다 재미지 않나, 진지하게 말해서 내가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소설 좀 본다고 당신의 머리에 노루발을 꽂을리 없잖나? 나는 당신을 치지 않을테니, 당신도 손에 든 그 장도리 좀 놓고 얘기하자.

아, 그리고 학생. 학생은 이 ‘올드보이’가 뭐라고 떠드는지 하나도 모르겠어도 만 19세가 되고 나서 올드보이를 보기 바란다. 불법이다. 자기는 어겨놓고선 알아 먹지도 못할 소릴 해댄 주제에 꼰대질 해서 미안하다. 그래도 그른건 그르다고 해야 어른 아니겠나. 알고도 못고치면 문제가 있지만, 정말 반성한다.

  1. 물론 최근 교육 현장에서는 생명 존중 차원과 정서 차원에서 이걸 하지 말자는 운동이 일어나는 걸로 알고 있다. ‘비유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
  2. 솔직히 이젠 성인이고 어느 정도 시효가 지났을거라 생각하니 얘기하는 거다만. 잘못이니 따라하지 말자. 거듭 말하지만 반성한다. ↩︎
  3. 주로 도쿄도가 한다. 지방 행정과 교육 행정이 분리된 자율 기구인 우리와는 달리 지방자치단체가 교육 행정 기능을 가지고 있다. 법령이 아니라 도 조례에 의해 규제되지만 서울과 경기도를 생각하면 쉽겠지만, 인구도 엄청나고 대다수 출판사의 본사 기능이 도쿄에 있는 이상 상업 출판물이 도쿄도에서 규제되는건 전국에서 규제되는 것에 다름 아니다. ↩︎
  4. 사실 돈 안내고 해적본을 보는게 우려스럽지만, 그런 경우를 봤다면 오히려 이걸 도둑질이라고 타일러야 한다. ↩︎
  5. 글을 올리고 나서라도 나중에 발견하면 링크를 걸도록 하겠다. ↩︎
  6. 솔직히 개탄을 하자면 우리나라는 이게 삼위 일체 되고 있는게 문제라고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