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 뭔가를 이루었다고 할 만한 인생을 살지는 않았지만 세월이 흐르고 보니 너무나도 많은 것이 발전했구나, 라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이번에 전자동 에스프레소 머신(필립스 5400 시리즈, E5447/93)을 구입해서 원두를 갈아서 커피가 나오고 ‘Enjoy(즐기세요)!’라는 메시지와 함께 추출이 완료되어 만들어진 흠잡을 구석 없는 커피를 마실 때, 십수년전에는 모카포트로 어떻게하면 크레마를 최대한 추출할 수 있을까 고민과 시행착오를 했었고, 캡슐커피를 처음 썼을 때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었던 것을 추억합니다. 6년간 쓴 네스프레소에 큰 불만은 없지만 몇달 묵은 캡슐이 아니라 신선한 커피 원두로 뽑아 내린 커피의 맛이나 향, 크레마에는 정말 만족하고 있습니다(더욱이 캡슐 머신과 달리 이 기종은 매우 간편하게 맛과 양을 세세히 조절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기계를 사용하는 동안은 메인테넌스를 끊임없이 해야하는게 걸립니다. 세상에 공짜가 없네요. 1~2일에 한번 물받이를 치워주고 원두 찌꺼기를 버리고, 매주 한번 이상 추출기를 더운물에 세정하고, 매달 한번 커피 기름때 제거를 해주는 알약을 넣어 청소를 해주어야 합니다(알약을 넣고 그릇을 아래에 놓고 버튼만 누르면 되는 절차긴 합니다) 여기까지는 구입후 직접 해보았는데 딱히 번거롭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재미있기까지하고 메인테넌스를 하면 한 만큼 맛이 좋아집니다. 추가로 아직 하진 않았지만 마시는 양에 따라서 한두달에서 서너달에 한번 추출기 이곳저곳에 기름을 쳐줘야 합니다. 그 외에 세 달에 한 번, 정수 필터를 갈아줘야 하는게 권장된다고 합니다(화면에 교체시기가 표시된다고 하네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추출기를 세정해주고 알약을 넣어 청소를 해주면 커피 맛이 다시 좋아지는걸 보며 신기하더군요. 그나마 모든것이 전자동화 된 기계가 이 정도니, 반자동이나 수동 머신으로 일관되게 맛있는 커피를 뽑는 바리스타 분들에게 존경을 하게 됩니다.
네스프레소를 처음 들이면서도 그랬지만 집에서도 맛있는 커피를 먹고 싶은 것을 어느 정도 충족하게 되니 가게에서 나오는 수준을 100% 따라가는건 안되더라도 흉내는 내고 싶어지더군요. 6년간 쓴 네스프레소에 큰 불만은 없지만 그것보다 조금 더 맛을 추구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진짜 에스프레소’가 아닌 캡슐 커피의 한계도 있습니다. 게다가 물론 네스프레소도 최고급 라인에는 다양한 우유 메뉴가 나오는 기종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기종을 쓰면서 에어로치노로 수동으로 거품을 내는건 귀찮고 품이 많이 가다보니 잘 안먹게 되더라고요.
가족이 좀 더 맛있는 커피를 원하던 차에 ‘신선한 원두를 자동으로 그자리에서 갈아서 마실 수 있는 기계가 있다’라고 말하자 모두가 솔깃하기 시작했고 저는 전자동 머신의 검토에 들어갔습니다. 결과적으로 원두 선택만 적절하고 신선하면 네스프레소보다 훨씬 나은, 생각보다 맛있는 커피를 마실 수 있습니다. 쓰는 원두 나름이겠지만 커피 못 만드는 가게나 초저가 카페는 간단히 능가하지 않을까요? 네스프레소보다 맛있고 무엇보다 신선합니다. 분쇄하고 추출하며 나는 향은 일종의 특권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네스프레소처럼 이 원두 저 원두 바꿔가면서 마시기에는 좀 부적절합니다. 물론 그럴 용도를 위해서 분쇄한 원두를 1회분 넣을 수 있는 구멍이 있는데 그럴거면 자동 머신을 왜 삽니까?
라테, 카페오레, 마키아토 등 우유 함유 메뉴를 포함해서 다양한 메뉴를 버튼만 눌러서 마실 수 있고 커피를 조금 더 진하게라던가, 물이나 우유를 좀 더 늘리는 것도 간단하게 할 수 있어 정말 좋습니다. 전자동인데다 한글이 나오는 액정 화면에 터치 조작 방식이라 조작도 직관적이고 간편한 편이라 기계에 익숙치 않은 가족도 커피를 편하게 내려 마실 수 있었습니다.
이 제품의 셀링 포인트 중 하나인 라테 고(Latte Go) 우유 추출기는 매우 편리해서 우유 메뉴를 마실 때 전용 우유 용기에 우유를 넣고 기계에 꽂고 메뉴를 선택하기만 하면 자동으로 거품을 내서 컵에 따라 줍니다. 청소 메뉴에서 버튼 한번만으로 우유 시스템 내부를 헹굴 수 있기 때문에 가끔 우유통을 비우고 씻어주기만 하면 됩니다. 내부에 관이 없는 구조라 청결하고 막힐 우려가 없다는 느낌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네스프레소 때나 (최소한 설명서를 보기로는) 다른 브랜드 머신과는 달리 정기적인 내부 세척(주 1회의 추출기 헹굼과 한 달에 한 번 기름때 제거제 투입)과 윤활(2달에 한 번), 정수 필터 교체(대략 3달에 한 번) 등 메인테넌스가 필요 합니다. 또, 여기에 필요한 유지 부품을 구매해서 사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기름때 제거제, 윤활유, 필터). 따라서 집이나 사무실의 누군가는 이 기계를 관리하는 ‘당번’이 될 필요가 있습니다. 유지 보수 자체는 크게 어렵지 않고 설명서나 웹사이트에 설명도 있고 비디오도 있지만 아무튼 요령을 미리 숙지 해둘 필요는 있습니다. 물론 호퍼에 원두를 채워 넣거나 물을 보충하고 가득찬 물받이를 비우는 일도 해야 하지만 이건 딱히 요령이랄게 필요 없으니 굳이 당번을 정할 정도의 일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제품을 ‘당번’인 제가 아닌 다른 식구들이 할 일이라곤 전원 켜서 메뉴 고르고 추출 버튼 누르는 것밖에 할 일이 따로 없을 정도(이전에 마신 취향을 기계가 4명까지 기억한다)로 직관적인 조작이나 세척과 보관이 편리한 우유 용기(‘라떼고(LatteGo)’)가 드롱기나 멜리타 등 경쟁사 제품에 비해 장점이라고 생각하며 비슷한 기능을 갖춘 경쟁사 제품(예: 드롱기 프리마돈나 엘리트)을 구입하려면 정식 수입 제품의 인터넷 가격 기준으로 이 제품 가격의 최소 2배에서 3~4배 가량의 금액이 필요하다는걸 알았습니다. 유지 부품이 필요하지만 크게 비싼 편은 아니고 사용 빈도도 높지는 않습니다, 또 우유통(8만원 가량)이나 (핵심부품인)추출기 등 부품 교체 비용도 상대적으로 저렴한 편(10만원대 중반)입니다.
이상으로 볼때 맛있는 커피와 다양한 커피 메뉴를 집이나 소규모 사무실에서 즐기기 위한 마지노선적인 제품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만, 커피의 맛을 위해 세척과 관리를 위한 수고를 들일 자신이 없다면 캡슐 머신이 차라리 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손으로 내리는 것이나 모카포트, 수동/반자동 머신에 비하면 훨씬 편하지만 어찌 되었든 그 자리에서 추출하는 머신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