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배가 드러나는것 같아 그닥 하지 않은 이야기지만, 나는 상당히 어릴때부터 PC통신을 한 세대이다. 확실히 말해서 내 또래는 PC통신을 하지 않았다. 내가 PC통신을 하거나 IRC에 접속을 하면 모두가 대견하다고 여겼다. 내가 IRC에 처음 접속해서 내가 초등학생이라고 밝히자 육군사관학교에 다닌다는 분은 학교에 나오면 맛있는걸 사줄테니 꼭 나오라고 했을 정도였다.
내가 처음 PC통신을 썼을때가 1995년인가 1994년인가. 천리안을 지정점을 통해서 어머니의 지인이 대신 가입을 해주었을 때였을 것이다. 그 이후로는 이 통신사 저 통신사 다 가입했다. 하이텔도 가입하고 나우누리도 가입하고 유니텔도 가입했다. 넷츠고, 채널아이도 가입했는데, 유니텔에 가입했을때는 한가지 우여곡절이 있었다. 유니텔은 초등학생인가 미성년자는 꾸러기라는 서비스에 가입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서비스가 정말 재미없었다. 나는 천리안이나 나우누리, 하이텔을 통해 어른이 쓰는 서비스에 길들여질 데로 길들여져 있는데 ‘애들 서비스’에 가둬질 수가 없었다. 덕분에 어머니를 닥달해서 삼성SDS에 전화를 해서 들들볶아서 추가 요금과 문제가 생길 경우에 발생하는 모든 문제를 감수한다는 조건을 달고서 꾸러기를 떼고 사용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 ID 들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때도 문제가 없었던건 아니다. 파란 화면에 추억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 전용 프로그램의 추억 또한 많이 있었다. 호기심이 충만했기 때문에 알록달록한 프로그램에 가지는 호기심 또한 많았기 때문이다. 불법으로 깔려왔던 이야기 대신에 내가 돈을 주고 샀던 통신 프로그램 이야기를 잊을 수가 없고. 그 커다란 박스를 잊을수가 없다. CD가 되면서 작아진 박스에 좀 실망을 하긴 했지만. 용돈을 모아서 산 프로그램에 감흥을 잊을 수가 없다. 초등학생이 돈 한푼 한푼 모아서 그걸 샀는데 황태욱님은 상 안주나? (농담)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새롬 데이터맨을 썼지만 그래도 마지막 버전 가까이 까지 돈을 주고 이야기를 샀던것 같다. 무료가 되기 거의 직전까지. 이야기의 설명서 몇 페이지 몇 째줄 몇번째 단어는 뭐죠라는 특이한 복제 방지 장치(?)를 풀기 위해서 서재의 수많은 책을 뒤져야 했던 추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지금도 이야기의 5.25″ 디스크가 있으나 아마 드라이브와 OS이전에 책이 없어서 쓰지 못할것 같다. 하하.
통신비… 천리안과 통신비는 참 많이도 나왔다. 전화료도 많이 나왔고 천리안 요금도 많이 나왔고. 아버지가 경제적으로 윤택했을 때였고. 덕분에 곧잘 혼나지 않고 잘 썼다. 고맙게 생각한다. 그러니 나는 오늘날 이런 혜택을 누리고 살고 있지 않을까? PDA를 처음으로(Palm III를 1998년에 Cyberian Outpost에서 내 스스로 수입한게 이 때 즈음이다) 만지게 된 것도 이 즈음이니 정말로 감사한 노릇이다. 나중에는 할머니의 도움으로 아이팩을 만지게 되니 집안의 도움이 참 커다랗다. 몸이 좋지 않아서 인생의 변화가 있었지만 이래저래 집안 도움은 많이 받았으니 버림 받은 팔자라고 할 수는 없으니 어찌보면 신은 공평한 셈이다.
당시에 하드웨어 동호회에 가입하려고 했는데 18세 미만은 가입할 수 없다는 조건을 걸고 있었는데 나는 분위기를 망치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왜 못하냐고 동호회 운영진과 천리안이었나? 까지 항의를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우라질. 아아. 지금으로써는 우스울 노릇이다. 게시판을 살펴보고 3메가짜리 MP3 파일을 몇분 걸려서 그것도 분당 요금내면서 다운로드 받아가며(그게 아마 음원단체의 압박때문에 그렇게 바뀐 걸로 안다, 마치 지금의 저작권 단체의 압박마냥) 들었고.
인터넷을 쓰기 위해서 인터넷 프로바이더를 따로 수소문하거나 했더랬던 시절이 기억난다. 조금이라도 빠른 회선에 접속하기 위해 노력하고 고속 회선이 통화중이면 안달이나고 회선이 연결되더라도 느리게 접속되면 속이 터지고… 흐흐 브로드밴드 세상에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들이 그때는 있었던 것. 왜 나는 그 시절을 반추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