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려져 나간 내 추억의 장소.

커피나 마실까. 양손에는 서점에서 산 책이 바리바리 들려 있었고, 아직은 찬 날씨에 몸을 데울 겸, 산 책을 찬찬히 살펴볼 겸 익숙한 발걸음으로 커피숍으로 향했다. 여러 사람들이 앉아서 대화를 나누면서 왁자지껄할 수원역 스타벅스로.

정확하게 그로부터 일주일전 나는 역시 수원역에서 볼일을 보고 있었고 주체할 수 없이 늘어난 지출로 스스로를 질책하며 수원역을 빠져나왔다. 그렇지만, 나는 이미 엄청난 지출을 책과 DVD, CD를 사는데 해버려서 학을 뗀 나머지 커피는 커녕 물 한모금도 마시고 싶지 않았다. 단지 그곳을 얼른 떠버려서 집에 돌아와야겠다는 생각 뿐.. 몇년간 그래왔듯이 항상 불을 밝히던 스타벅스의 사인과 사람들로 가득찬 매장안 그리고 이젠 몇 안남은 내가 아는 ‘파트너’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커피는 다음에.’ 라고 하고 지나쳐버렸다.

에둘러 말했지만, 그게 내가 스타벅스 수원역점을 본 마지막이었다. 내가 수원역을 다녀가고 나서 며칠 뒤에 그곳은 헐렸고, 내가 그 다음으로 갔을 때는 준비중이라 불편을 드려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내부를 안보이게 막아 놓았었다. 나는 기가 막혀서 위에서 스타벅스를 볼 수 있던 위층으로 올라가 봤더니 이미 카운터와 쇼케이스가 뽑혀져 나갔고, 의자를 비롯한 가구들은 전부 치워졌으며, 예전에는 관계자외 출입금지라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 하지 못했던 칸막이 뒷편의 부분도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휑하니 드러난 빈 공간에는 음료가 나오던 곳을 밝히던 램프가 덩그러니 방치되어 있었다.

나는 착잡한 마음에 기운이 쫙빠져서 들고있던 책봉투를 거의 질질 끌다시피 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커피숍 하나, 그것도 지극히 상업적인 커피숍 하나가 사라져버렸다지만, 내게는 단순히 커피숍 하나가 아녔다. 왜냐면 그 장소는 내 응접실이었기 때문이고, 그곳은 내 인간관계의 허브였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 스타벅스에서 라떼를 먹었을때가 기억난다. 2000년대 초엽이었고, 그 맛은 쾌히 좋지는 않았다. 아마도 설탕이 잔뜩 들어간 매일유업에서 나온 카페라떼를 기대하고 먹었기 때문이리라. 장소는 코엑스에서였다. 내가 본격적으로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건 2002년 동수원 뉴코아에 생긴 스타벅스에서 모카를 먹으러 가면서였고, 2004년부터는 수원역으로 다니기 시작했다. 특히 졸업을 앞두고 있던 2004년 후반부터는 거의 나는 스타벅스에 ‘출근’하곤 했는데, 학교가 일찍 끝나면, 나는 수원역으로 버스나 택시를 타고 와서 한가한 오전의 스타벅스에 자리잡고 베이글과 커피로 끼니를 때우면서 몇시간동안 책을 읽고, 글을 쓰다가 오후 즘에 귀가하곤했다.

나중에는 친구도 데려와서 같이 커피를 마시고 수다를 떨었는데, 장소는 역시 스타벅스였다. 나는 매일같이 카페모카 그란데를 마셔댔고,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한창 맛들인 사진을 찍어댔다. 나는 수많은 사진을 찍었는데 그중 상당수는 내 싸이월드  미니홈피에서 볼 수 있다. 일촌 공개지만… 아무튼 중요한건 수많은 사람들의 사진들을 스타벅스에서 찍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부모님은 내게 지출에 있어서 무척 관대했고, 그 관대함은 후한 ‘커피 인심’과 식사 대접으로 이어졌다. 그 소문으로 많은 친구들이 수원역을 지날때 유난히 도드라지는 내 모습이 있는지 한번 쓱 훑고 지나가곤했다. 생각해보라 한잔에 4000원하는 커피와 시간만 잘 맞춘다면 식사도 해결 할 수 있다. 나는 그 시간에 정말 많은 사진을 찍고 이야기를 나눴다. 몇탕을 뛰기도 해서 나는 하루에 많게는 서너잔의 그랑데를 비워서 속을 버리고 잠을 설친적이있었다. 우스개 반 진담 반으로 커피값을 아끼면 자그마한 집을 월세로 얻을 수 있을 정도로 커피를 마셔댔다.

졸업을 하고 나서도 스타벅스는 내 응접실이었다. 나는 안산에 살았고 친구들은 수원에 살았다. 친구들을 만나려면 수원에 가야했고, 수원은 안산보다 대도시였기 때문에 내가 찾는 물건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틈틈히 수원을 가곤했다. 잘은 모르겠다. 장소를 생각하는게 귀찮지 않았을까? 내가 스타벅스에서 죽친 이후로, 내가 수원에서 누구를 만나기로 하면, 당연히 그 장소는 수원역 스타벅스였다. 나는 약속시간 보다 일찍 도착하는 나름대로 자랑할만한 습관을 가지고 있었고. 나는 커피를 한잔 시켜서 마시며 책을 읽고 있었고, 시간이 되어 사람이 만나면 얘기를 좀 나누다가 근처에서 뭘좀 먹고 술 한잔 걸치고 헤어지는 것이었다. 그렇게 꽤 많은 사람들과 만났다. 누구누구는 불만이 좀 있었던걸로 안다. 하지만 내가 편리한 장소가 약속 장소가 되었다. 수원의 번화가라면 남문도 있고, 동수원쪽도 있지만, 내 친구들은 동수원에 살지 않았다는 점과, 내가 거기까지 가기가 힘들었고, 돌아오기도 힘들었다. 불만이 있더래도 어찌됐던 청구서는 내가 냈으므로 거절할 명분이 없단 점도 무시할 수는 없다. 싫다면 안나오면 그만이었으니까.

지금까지 누구누구는 ‘푸른곰의 여자’라고 불리는 누가 보아도 매력적이었던, 내가 짝사랑했던 여성들은 태반이 스타벅스에서 만났고, 스타벅스에서 얘기했고 사진을 찍었던 사람들이다. 굳이 말하자면, 내가 짝사랑했던 사람 중에서 단 한명만이 나와 앉아서 커피를 마시지 못했다. 언제 커피나 한잔 하자고 약속했었는데 아직까지는 약속뿐이다. 애석하게도. 그러므로 내 청춘사에서 잊혀질래야 잊혀질 수 없는 추억이 깃들었다고도 할 수 있다.

혹자는 상술로 표현하지만, 스타벅스의 ‘파트너’들과의 관계도 빼놓을 수 없다. 나와 내 친구 장쯔가 대학 생활을 시작하게 되면서, 수원역 스타벅스 방문을 좀 뜸하게 되자 많은 파트너들이 바뀌어서 아는 얼굴이 몇 안되게 되었지만, 한때는 점장이하 모든 파트너의 이름을 꿰고 이야기를 나누던 적이 있다. 물론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 그들도 내 피사체가 되어주었다. 나는 두명의 파트너가 정직원이 될때 제출하게 되어 있는 추천서를 정성껏 작성해주었고, 그 유능한 두 사람은 정직원으로 영전하여 다른 점포로 발령받았다. 개인적으로 무척 아쉽다. 아직도 그 중 한명과는 연락이 닿고 있다.

또 특기 해야할 파트너는 안용준님인데, 미소년틱한 이미지를 풍기는 사람이다. 군대를 다녀오기전에 한동안, 그리고 전역후에 죽 스타벅스에서 일했는데, 처음 봤을때는 그는 앳된 얼굴에 미모를 자랑했기 때문에 내 친구 중 한명이 ‘깜찍이’라고 불렀고, 한동안 그는 ‘깜찍이’라고 불리웠다. 나는 이런저런 얘기를 하게 됐고, 내가 찍은 사진을 싸이로 가져가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잘 알게됐다. 네이트온으로 이야기하기도하고 한가할때 카운터 너머로 얘기하기도 했다. 내가 짝사랑으로 고민할때도 그도 고민중이었고, 인생 선배로써 몇가지 조언을 해주곤 했고, 소주나 같이 마시자고 하곤 했다. 복무중에 편지를 한 두통 보내기도 했었다. 그와는 스타벅스 수원역점이 철거 당한 지금에도 연락이 종종 닿는다. 소주를 같이 한잔 하자는 3년전의 약속을 한번 이뤄보는게 개인적인 소원이다.

이렇게 잠시 생각해본 추억이 이만큼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났는지 모른다. 나는 운과 타이밍, 그리고 기술이 복합적으로 요구되는 단 두개의 녹색 벨벳소파를 차지하고 앉아서 커피를 마시면서 나타날지 모르는 내친구들을 기다리며 책과 신문을 보고 글을 썼으며. 친구들은 소파에 앉아있는 나를 찾아 이곳을 오곤 했다. 스타벅스 수원역점의 상실은 단순히 앉아서 커피를 마실 장소가 사라진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 짧은 인생의 한동안을 차지하던 의미있는 장소가 사라져버린 것을 의미했다. 당장 길을 건너서 매산로에 있는 생경한 스타벅스를 이용하라. 이런 불편은 차라리 경미한 것인지도 모른다. 마치 언제나 거기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고향 집이 헐린 충격에 비하면 말이다. 당장 헐리기 며칠전에도 나는 그러지 않았든가. 안용준님과 얘기를 하면서… 나는 후회스런 어조로 말했다. 거기 있는 벨벳소파에 앉아 카페 모카 한잔만 더 마셨으면 좋겠다고….

아마도 임대료 혹은 스페이스 사용 문제로 인한 교섭 트러블일 것이다. 다음에 또 수원역에 가보니 그곳에는 싸구려 옷가지를 파는 매대들이 들어선 ‘행사장’이 들어섰다. 겨우 몇개 묶어 얼마 이런 식으로 떨이하는 물건을 팔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서 헐었단 말인가… 라는 생각이 들자 떨떠름해졌다.

혹시나 이 글을 보는 사람이 있다면 말하건데, 매장을 임대하는 이든 임대 받은 이든 점포 철수는 입점보다 몇갑절 더 신중해야한다. 나처럼 그 점포와 그 브랜드를 믿고 애용하던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무 무감각하지만, 옆에 나라 일본에서만 해도 인기를 얻던 물건은 쉽사리 없애지 못한다. 같은 모양의 수첩이나 노트, 필기구가 수십년씩 나오는게 예사다. 인기가 없어 망했다는 베타맥스도 시장에서 결착이 난 다음에도 완전히 생산종료할때까지 8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우리나라는 너무 쉽게 만들고 너무 쉽게 없앤다. 이 물건 좋은데? 싶어서 알아보면 이미 내가 찾는 종류의 물건은 단종되어 버리곤 한다. 슬프게도 그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곰인형도 마찬가지다.. 이젠 생산이 종료되어서, 2004년에 들어온 ‘친구’들이 아마도 가장 젊은 친구들이 될 것이다. 명품과 명소라는게 생기는 과정을 생각해보라. 몇십년 몇백년 전통을 자랑하며 프리미엄을 받는 서양이나 일본의 브랜드들과 몇년도 안가는 우리나라 브랜드를 보면 아직 우리나라 브랜드는 전체적으로 멀었구나라는 생각을 덜수가 없다.


Posted

in

b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