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ter Jennings 와 노현정

 

피터 제닝스를 추모하며
1938-2005

Peter Jennings가 67세(미국나이)로 숨을 거두었을때, 어째서 전세계는 그의 죽음에 슬퍼했을까? 아마도 그의 방송사는 1978년부터 뉴스를 이끌며 시청률 1위로 만들어 주었던 그의 상실을 슬퍼했을테고, 시청자들은 매일 저녁 전세계에 있었던 일들을 요약해주는 World News Tonight의 메인 앵커를 잃었기에-솔직히 나는 WNT가 피터 제닝스 없이 돌아갈 수 있을까? 가 가장 염려되곤 했었다-슬퍼 했을 것이다.

그는 앵커이기 전에 기자였다. 또한 그는 전후 현대 세계 언론사와 걸어온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고, 그리고 역으로 무너지는 것을 직접 목도하고, 전세계의 노동 운동과 평등 운동, 그리고 공산주의의 억압과 사멸과정을 취재해왔다. 9/11 테러 당시에 12시간이 넘는 생방송을 진행했고, 일주일 동안 60시간 동안 방송을 하는, 초췌하고 창백한 얼굴의 제닝스는 많은 시청자에게 충격을 주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는 이 기간동안의 스트레스로 20년 넘도록 끊어왔던 담배를 다시 입에 물었다. 보통 담배를 끊은 인간과는 상종도 하지 말라는 말이 있는데 20년동안 담배를 끊다가, 다시 피울 정도였다니 그가 받았을 스트레스를 짐작케한다. 당시 그의 차분하고 안정된 보도에 대하여 워싱턴 포스트의 Tom Shales는 “인터뷰와 해설 보도의 대걸작”이라고 평했다.

그러한 스트레스와 과로, 그리고 경쟁 방송국의 톰 브로코우, 댄 래더 등과의 경쟁과 경력말기의 케이블 채널들에 의한 지속적인 시청률 하락으로 고생끝에 결국은 말년에 앵커직 사퇴를 발표하고, 자신이 폐암 말기라는 것을 밝히게 된다. 그리고 몇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그는 결국은 세상을 떠났다. 이를 애도하는 뜻에서, 마이클 블룸버그 뉴욕시장은 ABC의 뉴스 센터가 있는 66번가와 콜럼버스 애비뉴의 모퉁이를 “Peter Jennings Way”로 지정하고 올 2월 도로 표지판을 세웠다.

그는 생전에 14개의 에미상과 2개의 피바디상을 비롯한 수많은 상을 수상했고, 그의 모국이었던 캐나다에서는 민간인에게 주는 가장 높은 수훈인 캐나다 훈장(Order of Canada)를 수상했다.

나는 노현정씨가 좋은 사람을 만나서 결혼하는데는 불만이 없다. 엄마와 잡담을 떨면서도 노현정 정도면 뭐 재벌집에 시집가겠지? 이런 잡담을 떨어왔기 때문에 상대가 현대가의 누구래더라. 아무튼 누구래든 그다지 놀랄것이 없다. 내가 정말로 놀라운 것은 피터 제닝스가 그가 폐암으로 죽기 정확하게 4달 전에 앵커를 그만두었다는 것이다. 그 동안 그는 항암치료조차 안하고 뉴스를 진행해왔다고 한다. 그리고, 죽기 전까지 어떻게서든 재기를 위해서 화학 치료를 감내해왔다고 해서 주변을 숙연케했다.

노현정씨가 정말로 자신이 언론인이고, 순수한 의도로 언론인이 되었다면, 그리고 이러한 결혼 자체가 정말로 순수한 의도의 그러한 결혼이라면, 그녀가 결혼을 하겠다고 밝혀놓고 사라져버린다거나, 얼토당토 않은 이유로 시청자를 내팽겨치고 가서는 안된다는 말을 하고 싶다.

노현정씨에게 피터제닝스가 되라 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과연 한명의 위대한 ‘언론인’과 자칭 ‘언론인’의 차이의 간극이 얼마나 큰것인지 스스로가 한탄스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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